글을 이어나갈 자료들이 일부는 고가(입수불능)요, 일부는 입수가 늦어져서 진행 속도가 더딘지라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점 양지해주시 바랍니다.<2015.2.5>. 이제서야 올립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샬롬!! <2015.3.20/늦은오후>

[화중광야대특집] <지옥>(Hell)을  초기 한글성경에서 <음부>(陰府)로  번역, '불교 색채가 강하다'고 <킹제임스성경> 측에서 얼마나 비난하였던가??!!

[초림사건] <동정녀>(童貞女)의 최초용어는 <동녀>(童女)였나 <동신녀>(童身女)였나?? [3]

글/ 정재선 목회자

갑오개혁(甲午改革)은 1894년 양력 7월 27일(음력 6월 25일)부터 1895년 8월까지 조선 정부에서 전개한 제도개혁 운동을 말한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부른다.

갑오개혁 이후 신식 교육제도가 도입되고 여성을 위한 학교가 설립되기 이전에는 문자와 서책을 통한 여성교육은 개별 집안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즉 신식 교육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국가나 사회적 차원에서 여성교육을 위한 공공기관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여성 문자교육을 위한 공공기관은 없었지만, 특수집단의 여성을 위해 문자교육이 일부 시행되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세종 5년 12월 27일, 예조에서 다음과 같은 계를 올렸다:

    "제생원(濟生院)9)의 의녀(醫女)들은 반드시 먼저 글을 읽게 하여, 글자를 안 연후에 '의방'(醫方)을 읽어 익히도록 하고 있으니, 지방에서 선발하여 올려 보내려고 하는 의녀에게도 거주하고 있는 그 고을의 관원으로 하여금 먼저 '천자'(千字), '효경'(孝經), '정속편'(正俗篇) 등의 서책을 가르쳐서 문자를 대강 해득하게 한 뒤에 올려 보내도록 하게 하소서."

각 지방에서 의녀를 선발하여 의녀 양성기관인 제생원에 보내게 되는데, 제생원에서 의녀 교육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미리 문자교육을 시행해 문자를 아는 의녀 후보생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서명으로 볼 때, 이 때의 문자교육은 한문 중심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그러나 언문교육도 수반되었을 것이다. 천자문 등을 통해 한자를 가르칠 때 언문을 먼저 익히게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고, 또 그렇게 행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반가 여성 혹은 양민(良民) 여성을 위한 당시의 문자교육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려 주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개화기 이전에 여성에 대한 문자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제생원9): 1397년(태조 6) 설치한 의료기관. 童女(동녀) 수십 명을 뽑아 脈經, 鍼灸法을 가르쳐 부인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녀를 양성하였다. <백두현, '조선시대 여성의 어문생활', p.6-7.>

[부연] 1397년(태조 6)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설치한 구료(救療) 기관으로, 서울과 지방 빈민의 치료와 서울에서 발생한 미아(迷兒)의 보호도 맡아보았다. 서울에서는 특히 동활인서(東活人署)에 수용된 빈한한 환자의 치료를 맡았으며, 창고(倉庫)나 궁사(宮司)의 소속비(所屬婢)인 노비들 중에서 '어린' 비자(婢子) 곧 동녀(童女) 수십 명을 뽑아 맥경(脈經)·침구법(鍼灸法)을 가르쳐 부인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녀(醫女)로 양성하는 한편, 각 도 향약재(鄕藥材)의 수납(輸納)·비치 등의 일도 맡아보았다. 관원으로는 설치 당시에 지사(知事)·영(令)·승(丞)·주부(注簿)·녹사(錄事) 등을 두었다가, 1414년(태종 14) 지사·승·부승(副丞)·녹사·부녹사(副錄事)를 두었는데, 1459년(세조 5) 혜민서(惠民署)에 병합하였다. <인터넷>. <http://cafe.daum.net/distorted/8dgS/49?q=%F0%AD%DF%E6%EA%C2&re=1>

[우선필독관련자료] '음녀(淫女)인가??'음부(淫婦)인가??'[4]'<자세히보기>

['동정녀'에'관하여'앞으로'밝혀내야'할'주제]

1.'카톨릭교(수도회/전교회)'번역에서'차용한'것인가??
2.'중국에서'들어온'외래어였는가??
3.'일본에서'들어온'외래어였는가??
4.'앞으로의 활용은??


아직은 정확한 근거를 찾아낼 수 없다. 한글성경 용어 <동정녀>(童貞女)가 어느 곳에서 태동된 용어인지...그렇다고 해서 사전적 정의를 필적하고픈 마음은 전혀 내키지 않는다. 용어가 먼저 활용되었을 것이고, 그 후에 그 용어가 사전 속에 기록된 것이 상례이고 보면, 사전적 의미는 필자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2011년에 입수한 <한국교회사연구자료>(전12권) 영인본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이 자료들은 한국 카톨릭교(천주교)에서 발행한 것이다!!

[이미지/화중광야제작] <성경 마두> ㅡ 본 필사본은 한국 천주교(카톨릭교)가 1892년부터 1897년까지 활판으로 간행한 <성경직해>(聖經直解)의 대본이 된 것으로 알려진 필시본 <성경직해광익>(聖經直解廣益)에 수록된 신약성경 4복음서의 성경구절만을 가려 뽑아 묶은 일종의 성경주석서이다. 이 성경은 역관 출신 신유박해(1801년) 순교자인 최창현(요한)이 1790년경 번역한 것이다. <성경직해광익>는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 <디아즈>(1574-1659) 신부가 1636년 베이징(北京)에서 간행한 주일복음 해설서인<성경직해>와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이야>(1669-1748) 신부가 1740년에 펴낸 주일복음 묵상서<성경광익>을 모두 한글로 옮겨 하나로 합한 책이다. 본 필사본은 글씨체가 <성경직해광익>과 똑같아서 한 사람이 필사한 것이 확실하다. 필사 연대도 <성경직해광익>과 같이 한글표기로 보아, 매우 오래된 것은 분명하지만,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고, 다만 활판본 <성경직해>가 간행되기 시작한 1892년 이전에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5.3.17/깊은밤>


위 이미지는 <성경 마두 제1편> 곧 <마태오복음 1:1-16>의 본문을 기록한 다음에, 그것을 '풀이한 것'(풀님=주석) 중에 한 부분으로서, 이 풀이 속에서 <동신녀>(童身女)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필자는 이 용어가 우리말 1700년대부터 1800년대에 사용되어 온 <처녀>(處女) 용어의 단초(??)가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로써 이 시대에는 <처녀>라든지 <동정녀>(童貞女)라는 용어가 생성되지 않았을 것이요, 다만, <태조> 6년(1397)에 세운 의료기관인 <제생원>에서 의녀를 뽑을 때, 처녀에 준하는 용어 <동녀>(童女) 용어가 등장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1823년에 중국에서 발간된 <모리슨역본>에 이 <동신녀>를 입증해주는 용어가 나타난다!!

[이미지/화중광야제작] 필자가 2001년 홍콩선교여행 중에 '홍콩성경공회'의 <이치공>(李志剛) 총무님으로부터 기증받은 성경이다.  <처녀>(處女) 대신 <동신자>(童身者)로 번역되어 있다. <馬禮遜, '新遺詔書', (馬禮遜深文理譯本 1823年版), 香港聖經公會, 1977>.


그러다가 아래 이미지에서 보듯이, 1910년에 이 <동신녀><동졍녀>(동정녀)로 번역되어 있다. 본 <사사성경>(四史聖經)은 번역자인 한기근(韓基根/바오로/1868-1939) 신부가 역주(譯註)하고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감준(감수)하여, 서울소재 '성서활판소'에서 간행한 신언약성경 중 사복음서의 한글 완역본(完譯本)이다.

[이미지/화중광야제작] ①<왼쪽이미지> '한기근'(한바오로) 신부의 사목(司牧)에 관하여, 특히 '한국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를 위한 헌신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의 은인, 한기근(韓基根) 신부 ㅡ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우리 수녀원과 고아원에 궁핍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동안 프랑스 성영회에서 고아들을 위해 보내주던 지원금이 줄어들다가 중단되어, 뚜렷한 수입이 없던 수녀원에서는 150명이 넘는 고아들의 식생활을 해결하기조차 힘들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한국의 각 지방에 있는 신부들이 우리 수녀원을 많이 도와주셨는데, 그 중에도 한 기근 바오로의 신부를 우리는잊을 수 없다. 당시 한 신부는 경향잡지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강론이나 글을 통해 고아들을 위해 자선을 베풀라고 호소함으로써 간 본당의 신부들과 교우들의 호응을 얻어 위기에 처해 있던 우리 수녀원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한 신부는 1924년부터 1939년 73세로 선종할 때까지 우리 수녀회의 지도신부로 있으면서 수녀들과 고아들의 고해성사와 미사, 성체강복, 영세와 보례, 상례까지 도맡아 해주었고, 수녀들에게는 국사와 한문, 한글, 수학 등의 일반지식까지 가르쳐주었다.' <한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888-1988).'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988, p.36>.

②<오른쪽이미지>는 <사사성경> 중에서 <성말두>(마태오복음>을 번역한 '손성재'(손야고보) 신부의 희귀한 모습이다. <'상교우서' 2013년 가을호>.

③<중앙이미지>는 1910년 간행된 한글번역 4복음서 <사사성경>이다. <성마두복음 1:23>(마태오복음 1:23)에 <동신녀> 대신에 <동정녀>로 수정 번역하였다.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성경 한글번역 계획에 따라, 1906년부터 당시 황해도 황주(黃州) 본당 주임 한기근(韓基根) 신부와 황해도 봉산 검수(檢水) 본당 주임 손성재(孫聖載) 신부가 4년간에 걸쳐 번역한 것으로, 손 신부는 <마태오복음>을 번역하고, 한신부가 나머지 <3복음>의 번역과 전체(4복음)의 <풀님>(역주/譯註) 작업을 하였으며, <뮈텔> 주교가 감준(監準)하였다고 전한다. <한바오로 역주, '사사성경', 서울: 성서활판소, 1910, p.5>.


한편, 한기근 신부는 본 <사사성경>(四史聖經) 번역의 출판에 앞서 일반 교우들의 강독을 위해 띄어쓰기와 마침표를 사용하려 했으나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우리 철자법은 많은 시정이 요구되나 감히 시정하지는 않았다'고만 밝힐 뿐이다. 본 <사사성경>(四史聖經)의 크기는 14.5cm×8.5cm, 445면의 양장판이며, 1971년 <공동번역 신약성서>가 나오기 전까지 60년간을 한국천주교회의 유일한 복음서로 읽혀 왔다고 전한다. 그리고 한기근 신부는 라틴어에 능통하였으며, 한글번역에 사용된 저본은 라틴어 <불가따역>(Vulgata)이었다. 이는 다음에 언급되는 <중국어성경번역>에서 사복음서를 <사사유편>(四史攸編)이라고 제목을 붙인데서 참고하였을 것은 당연했던 상황이었다. 그 실레로 <성경직해>(聖經直解) 역시 중국어 서명 그대로 따온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실례는 중국어 성경번역에서도 찾아진다:  예수회 선교사 '쟌 바쎄'가 최초로 라틴어성경 <불가따역본>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장시'(江西)는 중국의 '도교'(道敎)가 태동된 한 지방이다. 장시의 성도(省都)인 '푸저우'(福州)는 다양한 크리스투인들이 있다. 그리고 '장시성경학교'(Jiangxi Bible School)가 있다. 17세기에 카톨릭교의 한 '프랑스외방전교회'(MEP=Mission-Etrangères de Paris) 소속의 선교사인 <쟌 바쎄>(Jean Basset/1662-1707)가 이곳 '장시'를 비롯해서 중국 일부 지역에서 전교(선교)하였다. '장시'는 카톨릭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곳이다.

[이미지/화중광야제작] <Toshikazu S. Foley, Biblical Translation in Chinese and Greek: Verbal Aspect in Theory and Practice, Brill, 2009, p.17-18>. 이 책은 고가(26만원)라서 부득이 '캡쳐'하였음을 양해를 바란다.  (2015.1.07/깊은밤).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최근에 입수된 자료를 중심으로 해서 다음 주제에서 다룰 것이다!! (2015.3.19/새벽)


다음 자료는 '프랑스외방전교회'가 공개한 것으로서 '쟌 바쎄' 선교사의 활약이 가장 신빙성있게 기록되었다 판단하기에 이른 것이다. 불어에 약한 필자로서는 이 불어문을 1차적으로 영어문으로 옮긴 후, 그것을 근거로 해서 번역을 착수하였다가, 나머지 부분을 이제서야 마치게 되었으니, 의미전달이 부족함도 있을 것이다. 혹여 독자께서는 불어에 능통하신 분의 도움을 얻어 곁들인다면, 한결 이해가 수월해질 것이다. 그리고 자료입수가 늦어지고 급한 다른 주제글을 올리느라, 본 주제글이 2개월 이상 늦어짐을 양지해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본 번역문은 차후에도 필요시에는 교정하게 될 것이다!! 샬롬!! <2015.1.7/초벌시작><2015.3.19/번역완료>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다 카톨릭교 신앙을 전수한 시기는 1640년이었다. 이후 중국에는 카톨릭교인에 대한 엄청난 핍박과 순교의 피바다를 이룬다. 이에 관한 <역사적진실>은 차후에 다루게 될 것이다!!

◆[이미지/애니메이션] 중국대륙의 시대별 변천사를 한눈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사제들의 전교장소 (Place aux prêtres chinois):

    Incapables d’accepter le piao, les missionnaires étrangers doivent sortir du pays. Au XVIIIe siècle, l’avenir de l’Église en Chine va reposer sur quelques prêtres chinois. Ceux-ci devront exercer leur ministère la plupart du temps dans la clandestinité. Les successeurs de l’Empereur Kangxi accentueront la répression du christianisme déclaré culte pervers (xiejiao).

    체류증명서(票)를 입수할 수 없게 되자, 외국 선교사들은 중국을 떠나야 했다. 18세기에, 중국에서의 '교회'의 미래는 일부 중국인 사제들을 기반으로 하게 될 것이었다. 이들은 거의가 지하에서 그들의 전교사역(전도사역)을 해나가야 할 것이었다. 강희제(康熙帝)의 후계자들은 크리스투교(개신교/카톨릭교)를 사교(邪敎)라고 강조하였다.

    Au Sichuan, Mgr Artus de Lionne, vicaire apostolique depuis 1696, réussit à recruter quatre prêtres pour son vicariat. En 1700, Il confie aux pères des Missions Étrangères Jean Basset (1662-1707) et Jean-François Martin de La Baluère (1668-1715) la ville de Chengdu et la partie occidentale du Sichuan. Deux lazaristes, disciples de Saint Vincent-de-Paul, l'un italien, Appiani, et l'autre alsacien, Mullener, se mettent aussi à sa disposition.

    스촨(四川)의 경우, 1696년 이후부터 사도부주교(使徒
    副主敎)인 '아르투스 드 리용'(Artus de Lionne) 주교가 자신의 대목구(代牧區/vicariate=정식교구가 아닌 포교지)에 네 명의 전교사(선교사)들을 충원시켰다. 1700년에, 그는 외방전교(해외선교)의 신부들인 '쟌 바쎄'(Jean Basset/1662-1707)라 발루 출신의 '쟌-프랑소와 마틴'(Jean-François Martin La Baluère/1668-1715)를 스촨의 청두(成都)와 서부지역으로 파송시킨다. 그리고 두 명의 빈센트회 수도사들, 곧 한 이탈리아人 '아피아니'(Appiani)와 알자스人(독일계) '물레너'(Mullener)를 자기 처분대로 파송시킨다.

    Ces "prêtres de la mission", qui rendront populaire le nom de "missionnaires", sont envoyés en Chine par la Propagande pour y ouvrir un séminaire. Ils espèrent pouvoir y parvenir dans une région reculée de la Chine. Mgr de Lionne leur confie Chongqing et la partie orientale du Sichuan. Deux congrégations missionnaires différentes se trouvent ainsi assumer des responsabilités dans la même province. Bien que fort peu nombreux et confrontés à des difficultés considérables, les pères de ces deux sociétés vont malheureusement se disputer le territoire.

    스촨(四川)의 경우, 1696년 이후부터 사도부주교(使徒
    副主敎)인 '아르투스 드 리용'(Artus de Lionne) 주교가 자신의 대목구(代牧區/vicariate=정식교구가 아닌 포교지)에 네 명의 전교사(선교사)들을 충원시켰다. 1700년에, 그는 외방전교(해외선교)의 신부들인 '쟌 바쎄'(Jean Basset/1662-1707)라 발루 출신의 '쟌-프랑소와 마틴'(Jean-François Martin La Baluère/1668-1715)를 스촨의 청두(成都)와 서부지역으로 파송시킨다. 그리고 두 명의 빈센트회 수도사들, 곧 한 이탈리아人 '아피아니'(Appiani)와 알자스人(독일계) '물레너'(Mullener)를 자기 처분대로 파송시킨다.

    Ces "prêtres de la mission", qui rendront populaire le nom de "missionnaires", sont envoyés en Chine par la Propagande pour y ouvrir un séminaire. Ils espèrent pouvoir y parvenir dans une région reculée de la Chine. Mgr de Lionne leur confie Chongqing et la partie orientale du Sichuan. Deux congrégations missionnaires différentes se trouvent ainsi assumer des responsabilités dans la même province. Bien que fort peu nombreux et confrontés à des difficultés considérables, les pères de ces deux sociétés vont malheureusement se disputer le territoire.

    선교사들이 인기있도록 이들 '전교사들'(
    priests of the mission)은 한 '세미나리'(예수회 신학원)을 개원하기 위해서 '프로퍼갠더'를 통해서 중국으로 파송된다. 그들은 이 사역을 머나 먼 지역 중국 안에서 성취시키기를 소망한다. 리용 주교가 그들에게 충칭(重慶/Chongqing)과 스촨의 동부지역을 제공한다. 이처럼 두 다른 전교단은 동일 지방 안에서 책무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비록 드믈고 심각한 난관을 직면하게 될지라도, 불행하게도 이들 두 전교단은 같은 지역에서 서로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것이었다.

    Ces missionnaires ont pour préoccupation première de former des prêtres chinois. Leur projet rencontre un obstacle majeur. L’étude du latin est requise par la congrégation de la Propagande en dépit d’autorisations anciennes d’usage du chinois. Malgré le souci d'adaptation exprimé dans les Instructions de 1659 la S.Congrégation de la Propagande a pris résolument parti pour le latin.

    선교사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중국인 사제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그들의 프로젝트는 하나의 큰 장애물 만난다. 사전에 중국어 사용을 승인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라틴어 연구는 집회에 필요한 것이다. '1659 적응지침' 표현에도 불구하고, 신성한 선전집회 단호하게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Le lyonnais Jean Basset, écrit un long mémoire en 1702 à Chengdu sous le titre: Avis sur la Mission de Chine. Déplorant le triste état de l'Église au Sichuan après tant d'efforts passés, il ne voit qu'un remède : traduire la Bible et autoriser une liturgie en chinois. "Ce fut, note-t-il, la pratique des apôtres et c'est le seul moyen de familiariser les Chinois avec le message chrétien".

    리옹人 쟌 바쎄는 1702년에 청두(成都)에서 하나의 긴 회고문으로 제목을 붙였다: 중국선교사역의 견해. 과거의 많은 노력 스촨(四川) 교회의 슬픈 상태를 한탄, 그는 하나의
    해결책
    을 본다: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과 예배를 승인하는 일이었다. '그 일은 사도들의 실천이었고 크리스투인의 메시지와 함께 중국어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라고 그는 술회한다.

    Jean Basset se met lui-même au travail et produit en six gros volumes une traduction chinoise du Nouveau Testament. En attendant une réponse à ses requêtes, Jean Basset recrute trois jeunes enfants au cours d'un voyage dans la province du Shaanxi.

    '쟌 바쎄'는 번역작업에 매진하였고, 신언약을 중국어로 번역한 6권의 대형규격의 책을 제작하였다. 그 요구측으로부터 한 반응을 기디리는 동안, '쟌 바쎄'는 세 명의 중국 학동(學童)들을 채용하여 '산시성'(
    陝西省)으로 떠나갔다.


[이미지/화중광야제작] Traduction Du Nouveau Testament En Chinois Par Jean Basset  ㅡ From the New Testament translation in Chinese by Jean Basset: 본 이미지는 예수회 <프랑스 외방전교회(MEP/Mission-Etrangères de Paris)가 제공한 최초의 <중국어성경번역>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자료 한 장을 입수하기 위해서 필자는 꼬박 2일을 지샜으며, 모르면 몰라도 마우스를 수 천번 클릭하였을 것이다. 만일 필자에게 이런 자료들이 충분하게 제공된다면, 바람직하고 타당한 글들을 올릴 수 있을턴데...자비량으로 너무 빈약하다 보니...시간과 물질이 충분하지 못함을 못내 서글픈 심정으로 중도 포기할 수도 있겠지만(??)...우리 <화중광야가족>의 십시일반 합력과 기도와 간구로 쓸어지지 않고 이렇게 좋은 자료를 찾아내고야 만 것이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이런 자료는 밖으로 내어서 <영인본>을 만들어서 온 천하에 배포하면, 얼마나 좋을까?? 도서관이나 자료 보관실에 두어 봐야 그것은 '죽은 문서'(??)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 중국어성경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개역>의 원판임을 감안하면, 한국의 개신교는 크게 반성해야 한다!! 본 <동정녀> 주제의 글이 마쳐지고 나면, 별도의 주제에서 <중국어번역성경>을 다루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판단되었다!! 따라서 이 글을 읽는 독자 제위는 글자 글자 한 자를 '감사한 마음'으로 읽으시고 전도하시길 당부드린다. 제 아무리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지구 대변동이 닥친다 한들...두려워 말 것은...택한 자들을 위해서 <대환난>을 단축기켜 주신다고 예호슈아가 분명히 약속하셨으니...이 약속을 꼬옥 파지(把持)하면서 '카도쉬'(성도)의 그 길을 가시길 당부드린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징조들이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잖은가?? 샬롬!! <2015.1.13/이른아침>


[1702년에 예수회 선교사 '쟌 바쎄'가 최초로 라틴어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Comptant les préparer au sacerdoce, il confie leur instruction à son confrère La Baluère. Ce dernier commence à leur enseigner à la fois le latin et le chinois. Basset fait valoir qu'ils apprendront plus facilement en ne faisant d'abord que du chinois. En fait de méthode pédagogique, Basset rêve encore d'une réponse favorable à son projet de liturgie chinoise. Ironie du sort, l'un de ces enfants, André Li, est appelé à devenir l'un des meilleurs latinistes de la Chine.

    사제직을 예비하기 위해서, '쟌 바쎄'는 그 중국인 학동들에게 <
    The Baluere> 라는 칭호를 제공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라틴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가르치기 시작한다. 바쎄는 우선 먼저 그들이 중국어를 더 많이 쉽게 배우기를 강조한다. 교육학적 방법 관점에서, 바쎄는 제안된 중국식 전례를 호감하는 반응을 얻는 꿈을 가지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학동 중 '안드레 리'가 중국 최고의 라틴어 학자가 된다.


    Bannis de leur mission pour refus de signer le piao, le père Basset meurt à Canton et La Baluère place ses séminaristes à Macao. M. Le Blanc, vicaire apostolique du Yunnan depuis 1696, prend soin des séminaristes. En 1717, il envoie sept Chinois, dont André Li, au Collège général du Siam. Le Collège général, fondé par Mgr Lambert de la Motte en 1665, avait déjà traversé bien des épreuves. De 1717 à 1727, le Collège, installé à Mahapram, connaît une belle période sous la direction de M. André Roost (?-1729), licencié en Sorbonne, ancien régent du Collège des Trésoriers à Paris. L'arrivée des élèves chinois renforce les effectifs.


    체류증명서(票) 발급 거절을 당하여 전교로부터 추방당하자, 바쎄 신부는 칸톤(광주) 안에서 죽었다. <
    The Baluere>는 마카오 안에 그의 신힉교를 세운다. 1696년 이래로 운남의 대목(大牧) <브랑>(M. Le Blanc)이 그 신학교를 돌보고 있다. 1717년에 그는 '안드레 리'를 포함한 7명의 중국인들을 <시암대학>에 보낸다. 1665년에 '램버트' 주교가 세운 이 대학은 이미 많은 수난들을 겪었던 것이다. 1717년부터 1727년까지, '마하프람'에 소재한 이 대학은 '안드레 루스트'(? -1729)의 지도아래 황금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는 소르본느 학사 출신으로서, 파리소 소재 '회계원대학'의 전 섭정이었던 것이다. 7명의 중국인 학샹들의 도착은 한결 인력을 강화시킨다.

    En 1718, cinquante élèves sont répartis en six classes où l'on enseigne la philosophie et la théologie, les humanités, le latin et les langues d'Extrême-Orient. Le succès même de ce séminaire semble avoir soulevé les jalousies portugaises. Le supérieur M. Roost, accusé de jansénisme, est rappelé à Paris. Le jeune théologien André Li prouve alors sa maîtrise du latin en prenant hardiment la défense de son maître. Aucours de l'année 1725, il est ordonné prêtre par Mgr de Cicé, à l'âge de 33 ans.

    1718년에는 50명의 학생들이 6학급으로 나뉘어 철학, 신학, 인류학, 라틴어와 극동언어를 가르친다. 이 신학교의 이러한 성공이 포르투갈측의 질투를 샀고, '루스트 씨는 얀센의 신조'로 고발을 당해 파리로 소환당하였다. 젊은 신학생 '안드레 리'가 라틴어 대담하게 라틴어를 구사하여 자기의 선생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1725년에 33세의 나이에 '시세'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Comme son confrère Antoine Tang, André Li appartient désormais à la 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qui l'a formé au sacerdoce. Il en reçoit un modeste viatique. Après un an au service du Collège, il rejoint Canton en septembre 1726 et se met à la disposition du procureur des Missions Étrangères M. Antoine Guignes. Celui-ci lui fait prêter le serment anti-janséniste requis par la Bulle Unigenitus et l'envoie en mission au Fujian à Hinghoa, un district encore administré par les Missions Étrangères bien que l'ensemble de la province soit confié aux dominicains espagnols. Antoine Tang l'y rejoint bientôt.

    그의 동료 '안소니 탕'처럼, 이제 '안드레 리'는 사제훈련을 맡은 예수회 '프랑스외방전교회'에 소속된다. 그는 겸손한(소액) 훈련수당을 받고 있다. 이 대학에서 1년간 봉직 후에, 그는 1726년 9월에 칸톤(광저우/廣東)에 가담하고, '안투앙 쥬인'의 처분에 의해 중국 소재 '프랑스외방전교회'의 감찰관에 매진한다. 근래 교황 클레멘트 11세의 '유일독자론' 교서(1713년 공포)가 요구하는 '반얀센주의 서약'을 시킨 후, '쥬인'은 그를  스페인의 '도니니카회'에게 위탁된 푸젠성(福建省)의 '홍화'(興化)로 파송시킨다. 곧 바로 '안토니 탕'이 그에게 가담하니, 이로써 두 젊은 중국인 사제들은 자신들의 전교의 첫 해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첫 한글성경 <예수셩교젼셔>는 예수회의 <중국어역본>이다??!!]

예수회의 구신언약 중국어 역본은 1968년에서야 공개된다!!
1814년에 <모리슨역본>(馬禮遜譯本)이 최초로 발행된지 150년만의 발행이었다!! 이 미스테리의 배후관계를 밝혀져야 우리 <한글성경>의 정체(??) 또한 밝혀질 것이다!! 특히 존 로스 선교사가 첫 한글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번역의 저본으로서 <킹제임스성경>을 번역저본으로 삼았다는 근거가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으니...이 또한 대단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의 가방 속에는 항상 <전수사본>(TR/표준원문)과 <킹제임스성경>이 담겨져 있었다는데...모리슨 선교사의 재화(在華=중국체류) 선교사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역경사업이었다. 이 역경사업(譯經事業)의 결과물이 <신천성서>(神天聖書)였던 것이다.

모리슨은 영국에서 중국 선교를 준비하고 있을 때인 1805년에 우연히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사사유편야소기리사독복음지회편>(四史攸編耶蘇基利斯督福音之會編, Evangelia Quatuor, Sinice)이라는 표제의 문서를 발견하였다. 그는 런던에서 중국 광둥(廣東) 출신의 유학생 용삼덕(容三德, Young Saam Tak/菫三託)을 만났고, 그에게서 중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모리슨은 이 청년과 함께 이 문서를 필사하였다. 이는 모리슨이 성경을 중국어로 역출함에 있어서 출발이 되었던 것이다.

<사사유편야소기리사독복음지회편>
은 17세기에 '예수회 파리외방전교회'(Societe des Missions Etrannges de Paris) 소속의 선교사 <쟌 바쎄>(J. Basset/중국명=白日昇,白日陞,巴設)에 의하여 역출(譯出)되어서 사용되던 2절판의 문서였다. 그런데 이 문서가 1737년이나 1738년에 당시 동인도회사의 지배인이던 <존 호지슨>(John Hodgson/East India Company In Canton/중국명=和治孫)의 명령에 의하여 광동에서 개작되었고, 1739년에 그가 영국으로 갖고 돌아와 당시 영국학사원의 회장이던 <한스 슬론 경>(Sir Hans Sloane)에게 증정하였다. 또 다시 슬론 경이 이 문서를 대영박물관에 유증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슬론 초본>(Sloane Manuscript)이라고 칭해졌고, 일반적으로는 <대조성경>(The Manuscript Harmony)라고 칭해졌다. <사사유편야소기리사독복음지회편>의 내용은 <대조사복음서>(The Harmony of the Gospels), <사도행전>(The Acts) 및 <사도 바울의 서신>(St. Paul's Epistles)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모리슨의 필사본은 홍콩대학에 현존하고 있고, 1938년에 한 천주교 인사에 의하여 또다시 필사된 <루이 드 쁘와로/푸와로>(Louis de Poirot)의 <思高手機聖經>은 홍콩 천주교 <사고성경학회>(思高聖經學會/Studium Biblicum Franciscanum/SBF) 도서관에 현존하고 있다고 전한다. <자세히보기>. (2015.1.12/깊은밤). 이에 관한 글은 <쟌 바쎄>의 <사사유편야소기리사독복음지회편>(四史攸編耶蘇基利斯督福音之會編>에 이어서 계속될 것이다. (2015.3.20/이른오후).

[이미지/화중광야제작] <마리쉰보쉬텅벤>(馬禮遜搏士謄本) ㅡ 위 성경은 <마리쉰보쉬텅벤>(馬禮遜搏士謄本) 우리말로는 <마례손박사등본>이라고 불린다. 이 성경은 1737년에 중국 '칸톤'(광저우/廣東)에서 등사하였고, 이 등사본을 당시 '왕립학회' 회장인 <한스 슬론>(Hans Sloane) 경에게 기증되었다. 그리고 슬론 경이 자신의 모든 수집품을 국가에다 내놓은 것이 오늘의 <대영박물관>의 초석이 되었다. 이 수집품과 함께 본 성경도 <대영박물관도서관>에 기증되었다. 때마침 <동인도회사>의 일원으로 중국에로 선교를 떠나기에 앞서, <런던선교회>의 주선으로 모리슨 선교사는 조력자인 중국인 교사 <용삼덕>(容三德/Young Saam Tak)으로 하여금 등사하게 하였고, 모리슨 선교사는 중국어 용어에다 일일이 영어로 의미를 표기하였고, 이 등사본을 휴대하고, 말래카(馬六甲)에 도착 '선교기지'를 잡았고, 그후 홍콩(香港)과 마카오(奧門)를 거쳐서 중국 '칸톤'(廣東)에서 본격적으로 선교사역에 정진하였다!!


이렇게 <모리슨역본>이 예수회 <파리외방전교회>(MEP) 소속의 <쟌 바쎄>(JEAN BASSET) 선교사가 라틴어 <불가따역>을 저본으로 번역한 <중국어문리역본>을 저본으로 삼은 이상, <모리슨역본> 이후로 전개되어 발간된 중국어 문리역 특히 <대표자역본> 역시 <불가따역>의 영향을 절대로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존 로스> 선교사가 <대표자역>을 교정 참고본으로 활용한 이상, 첫 한글성경 <예수셩교젼셔> 역시 <불가타역>의 영향권을 절대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는 로스 선교사의 <신언약성경>에 번역 메모를 남긴 그 자료가 입수되어 확인되기 전에는, 필자로서는 확증을 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전하면서...2개월 이상 늦어진 본 글을 여기에서 마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인내로서 기다려주셨을 독자 제위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샬롬!! <2015.3.20/늦은밤>

 
 
<Created/20150107> <Updated/20150110><20150112><201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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