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왕의 왕족 뿌리 [2] ㅡ The Royal Root Of King James

글/ 정재선 목회자


'한 어리석은 아들은 그의 아비에게 한 근심이요, 그를 낳은 여자에게 고통이다.' (잠언 17:25, KJV화중광야역)

'…그리고 자녀들이 부모들을 거역하여 일어날 것이며, 그들을 죽게 할 것이다.' (마태복음 10:21, KJV화중광야역)


◆제임스 왕 (King James/ 1566-1625) ㅡ 통치(1603-1625)

일부 비평가들은 '제임스 왕'을 '동성애자' 혹은 '카톨릭교인'이었다고 비난한다. 그는 영국 국민 누구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발행한 하나님의 그 말씀의 사역자였다. 청교도들로 하여금 자신이 발행한 성경과 함께 (일부는 청교도들이 '제네바성경'을 소지하였다고 주장함) '메이플라워號'(Mayflower)를 준비해서 신대륙 아메리카로 보낸 장본인이라고 전한다!! 오늘날 미국은 물론 우리 크리스천은 그의 은덕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킹제임스성경'도...!! 이미 새로이 알려진 바와 같이, 2007년에 400주년을 맞은 미국의 버지니아주의 '제임스타운'(Jamestown)은 메사추세츠주의 플리머스(Plymouth)보다 13년 앞서서 1607년에 정착지로서 조성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전한다. 이곳 제임스타운 정착지는 영국의 제임스 왕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였다면, 15세기부터 콜럼버스를 앞세워 본격화된 '남미의 카톨릭화'에 이어서 북미도 '카톨릭화되었을'(?) 것인데...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다면...과연 미국이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세계 선교의 교두보가 될 수 있었으며...?? 우리 한반도에도 '그 복음'이 본격적으로 도래할 수 있었을까...?? 이것에 대한 증거는 1606년 제임스 왕이 허락한 '버지니아 특허장'(The First Charter of Virgina)에 상세하게 명기되어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별도주제 '존 스미스 선장'(Captain John Smith)에서 다룰 것이다).


튜더 왕조의 비극

튜더 왕조의 창건자 헨리 튜더(Henry Tudor)는 1457년 웨일즈의 남서지방 펨부로크성(Pembroke Castle) 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켈틱인 원족으로서 그의 대적인 왕 리차드 3세가 살해된 그 유명한 '보스워스 필드'(Bosworth Field)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1485년에 왕이 되었다.

◆보스워스 전투(1483, 8.22) <Gladys Temperley, Henry VII, London:Constable & Co., 1917, p.21>.


그의 유일한 관심은 자기 백성의 안녕(welfare)이었다. 그는 한 전쟁으로 지쳐 찌들어진 국가를 계승받았고, 궁극에 가서는 전쟁들과 외국과의 마찰들을 종료시켰다. 1486년, 그는 적대 왕조 가문의 요크의 아름다운 공주 엘리자베스(Elizabeth)와 혼인하였다. 헨리는 예전의 불화들과 왕조간의 전쟁들을 종식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이 왕족의 행복한 부부는 사랑 만들기에 전념한지라...전쟁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일곱 명의 자녀들을 두었다. 그러나 네 명만이 생존하였는데, 두 아들 아더(Arthur)와 헨리(Henry/훗날 헨리 8세), 두 딸 마가렛(Margaret)과 메어리(Mary)였다. 마가렛(훗날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왕의 외종조모)은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4세(James IV)와 혼인하였고, 그 국가와 한 평화동맹을 이루었다.

◆왼쪽부터 헨리, 아더, 마가렛 - 마가렛이 훗날 제임스 왕의 외종조모이다!!

아더(1486-1502)는 생존하는 장남이었고, 다음 왕좌를 계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16세에 스페인 아라곤의 캐더린(Catherine of Aragon)과 혼인하였고, 이듬해 1502년에 원인 모를 병으로 죽었다. 그의 동생 헨리의 직함이 요크의 왕자(Prince of York)인 반면, 그의 직함은 웨일즈의 왕자(Prince of Wales)였다.

헨리가 1509년 6월 28일, 막 18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이 나이는 거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의 아버지의 죽음의 포착은 비난의 여지가 없었다!! 헨리의 아버지는 그의 마지막 유언에서 자기 아들이 왕위를 승계한다든지 혹은 아라곤의 캐더린(형수/죽은 형 아더의 아내)과의 혼인을 언급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는 결코 아라곤의 캐더린과의 혼인에 대하여 교황으로부터 여하한 특명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헨리 7세 통치 기간 중 신세계의 발견!!

역사상 가장 큰 사건들 중 하나가 왕 헨리 7세 통치 기간 중에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1494년에 '존 카봇'(John Cabot)에 의한 '신세계의 발견'(Discovery of the New World)이었다.

신세계를 발견하고 귀국한 후, 영국 안에 '보르지아의 로마교황의 교서'(Papal Bull of Borgia)가 선포되었다. 존 카봇은 스페인 종교재판이 자기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로 대신하려 함을 깨달았다!! (참고필독자료/美대륙 발견자 콜럼버스 아니다/자세히보기). 그는 왕 헨리 7세를 알현하여, 자신의 발견에 대하여 하나의 국왕헌장을 청하였다. 왕은 로마를 도전하는 한 큰 위태에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앞서서 카봇에게 헌장을 발행해 주었다.

역사를 통하여, 왕들은 '파문'(Interdict)이라고 하는 '교황의 번개에 의해서' 그들의 왕좌들로부터 쫓겨났던 것이다. 이 경우 교황은 자신의 파문(제명)을 보류하였으니, 이는 카봇을 콜럼버스로 대치시킴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영국간 한 동맹을 결합하고자,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Ferdinand and Isabella)의 딸 '아라곤의 캐더린'(Catherine of Aragon)이 헨리 왕의 장남 아더 왕자와 정혼하였다. 1501년 10월에 아라곤의 캐더린이 영국에 도착하였고, 1501년 11월 4일 아더 왕자와 혼인하였다. 5개월 후인 1502년 4월에, 아더 왕자는 한 '수수께기' 질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왕 헨리 7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10개월 후인 1503년 2월 2일에 한 아기를 생산한 후(이 아이 이름은 캐더린 튜더. 낳자마자 죽었다) 산후병으로 죽었다. 그 여자는 37세였다.


신세계 장악을 위한 전투!!

이 무렵, 캐더린은 가방들을 싸고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전반적인 신세계에 대한 통제가 위태로운지라, 그 여자는 귀국이 '금지'되었다. 그 여자에게는 후에 그 불미스런 왕, 헨리 8세가 된 아더의 동생 헨리에게 눈독을 들이라는 지령이 내려졌다.

캐서린이 영국의 왕과 혼인을 하게 되면, 그 여자가 '보르기아'의 로마교황 교서가 받아들여 지게 할 것이고, 스페인이 신세계를 소유하는데 있어서 영국이 도전하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헨리 왕과 그의 마지막 생존한 아들은 아더의 과부와의 혼인을 반대하였다. 하나의 미신에 사로잡힌 시대에서, 백성들은 그 젊은 왕자의 죽음을 하나의 흉조로 보았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카스틸레(Castile)의 이사벨라(캐더린의 모친)가 53세의 젊은 나이로 1504년에 죽었다. 하나의 순수한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아라곤과 카스틸레가 다시 한번 두 왕국으로 분열되어 서로가 약화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헨리 왕은 스페인과의 이러한 동맹관계가 크게 만족할 만한 것은 되지 않음을 보지 못할 정도로 교활하였다.

    1505년 6월 27일, 14번째 생일날 저녁, 웨일즈의 왕자 헨리는 웬체스터의 비숍과 추밀원 (樞密院)의 한 위원회에 나타나서, 캐더린과의 자신의 정혼을 엄숙히 항변하면서, 그 사실을 확증하지 않음과 백지화시켰다. (Mattingly, Catherine of Aragon, p.65).



프란시스단에 들어가라!!

이 무렵, 캐더린과 헨리 사이 한 혼인에 대한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불시에 모든 일이 바뀌자, 캐더린은 실로 스페인으로 귀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후레이 디에고 훼르난데즈 (Fray Diego Fernandez)라는 이름을 가진 프란시스단의 수도사 같은 한 라스푸틴 (A RASPUTIN)이 나타났다:

    오랜 동안 그 여자의 한 스페인어를 말하는 고백자를 보내 달라는 그 여자의 반복되는 탄원들이 스페인 안에서 무시되었다. 1507년 4월이 되기 전의 어느 무렵, 그 여자는 후레이 디에고 훼르난데즈(Fray Diego Fernandez)를 발견했다. 그는 그 여자의 어머니처럼 그 여자가 가장 매력에 끌려있는 '프란시스단 엄수파'(the Observant Franciscans)인 바로 그 수도원의 한 회원이었다. 대개 엄수파(嚴修派) 처럼, 그는 겸손하였다. 그러나 그는 올드 카스틸레(Old Castile)의 한 원주민인 한 스페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살라만카 (Salamanca)에서 공부를 하였고, 그 여자의 지적 관심들을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영국에서 오래 지냈기 때문에 영어를 말할 수 있었고, 거기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동기들이 무엇이든 간에---후레이 디에고의 동기들에 관해서 우리가 아는 바는 없어도---그는 성실하고 헌신적임을 보여주었다. 오래 가지 않아서, 그는 캐더린이 의지할 수 있다고 느낀 그녀의 가족 중에서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Mattingly, Catherine of Aragon, p.107).


계속 이어진다:

    후레이 디에고는 그 여자의 신앙 고백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여자의 종교 자문이 되었다. 그는 그 여자에게 세상 문제들은 물론 영적 문제들도 충고하였다. 그는 영국 안에서 대논쟁의 한 인물이 되었다. 케더린은 그에게 매우 헌신적이었다. 종교적으로 심오하였기에, 그 여자는 영적인 인도가 필요했다. 외로웠기 때문에, 그 여자는 한 친구가 필요했다. 그가 그 친구가 되었고, 그 여자는 그가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행하였다. 그 여자는 심지어 그에게 책들을 사주려고 용기를 내어 자기의 접시를 약간 팔기도 하였다. 그로 인하여 그 여자는 이사벨라(Isabella)나 돈나 엘비라(Donna Elvira)도 인정할 수 없는 방법으로 행동하는 때도 있었다. 그는 한 젊은이었으나, 좋은 평판은 없었음이 분명하였다. 그렇지만 캐더린은 그에게 밀접하게 매달려 있었기에 그의 잘못을 듣지 못하였다. 물론 스캔들도 있었음이 확실하였다. 새로 부임한 대사 후엔살리다(Fuensalida)가 충격을 받았다. (Roll, The Pomegranate and the Rose.).


헨리 왕은 자기 난폭한 아들에 대해서 하나의 고삐를 죄었다. 그는 헨리가 왕으로서의 자질이 없음을 알았다. 개성에 있어서도 한 아버지와 아들로서 전혀 다른 바가 없었다. 그는 캐더린을 만나도록 허락받지 못했다. 그래서 캐더린과 헨리를 접근하는 '유일한'(ONLY) 사람들은 프란시스단 수도사들이었다. 왕의 '죽음'(DEATH)만이 캐더린을 왕좌에 오르게 할 수 밖에 없는데, 정확하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


헨리 7세는 재혼하려 하였다!!

1503년에 자기 사랑하는 아내 엘리자베스가 죽은 후, 헨리 7세는 새 아내를 물색중이었다. 다음은 이탈리아의 한 역사가가 1506년에 왕에 관해 쓴 것이다:

    그(왕)의 몸은 호리호리 하였으나 잘 생겼고 튼튼하였다. 그의 키는 평균키 보다 컸다. 그의 외모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특히 그가 이야기 할 때 그의 얼굴은 화사하였으나. 그의 두 눈은 작고 파랬다. 그의 이빨은 보잘 것 없이 거무스름하였다. 그의 머리칼은 가늘고 백색이었다. 그의 안색은 창백하였다. 그의 영은 탁월하였고, 현명하고 슬기로웠다. 그의 마음은 용감하엿고, 결단적이었고, 가장 큰 위기 순간들에는 결코 차분하지 않았고,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Vergil, Anglica Historia, p.145).


헨리의 건강은 1507년까지는 건강하였다. 1503년에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죽은 후로, 몇몇 젊은 숙녀들이 장래 신부들로 물망에 오르고 있었다. 그들 중에 하나가 황제 막시밀리안 1세(Emperor Maximilian I)의 맏딸 오스트리아의 마아가렛(Margaret )이었다. 그 여자는 겨우 24세였다. 또 다른 신부감은 스페인의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Ferdinand and Isabella)의 질녀요, 나폴리의 여왕 요안(Joan)이었다.

그러나 그 혼인은 왕이 1509년에 52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자기 아버지의 죽음에 이어 즉시 헨리가 왕이 되었고, 자기 아버지의 모든 정책들을 바꾸어 버렸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고문들을 런던탑(The Tower)으로 보내어 처형시켜 버렸다. 그것은 정치적 쿠데타였다.

개성에 있어서도 한 아버지와 아들로서 전혀 다른 바가 없었다.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제는 어린 왕의 그 어리석음과 광기를 막을 자가 아무도 없었다.


헨리 7세는 독살당했다!!

헨리 7세에게는 자기 아들 헨리가 캐더린과 혼인함으로써 스페인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르기아의 칸타렐라'(Cantarella of Borgia/비소(砒素)로 만들어진 보르기아의 치명적인 독약의 대명사)가 약간 제공되었다:

    헨리 왕의 22년 통치(1507년)가 이제 와서 통풍으로 고통을 받기 시작함으로, 왕의 병약의 관점에서, 마아가렛과의 이 혼인은 계속 오래 미루어졌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 'defluxion'이 발생하여, 그의 허파들이 쇠약했으며, 일년에 3회(정기적으로 특히 봄에), 그는 쇠약함의 발작과 진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예전에 건강할 때처럼, 부지런히 자신의 직무를 수행해 나갔다. 이러한 경고가 나옴에, 이제 그는 교황 율리우스에 의해 주어지는 것 보다는 재물로서 왕 헨리 6세처럼, 자신을 한 성자가 되기 위하여, 다가오는 세상(죽음을)을 곰곰히 생각하였다. (Bacon, History of the Reign of Henry VII, p.237).


헨리는 그의 아버지가 살해된 후 '프란시스단'(하단 편집자주 참조)에 의해 혼인하였다:

    장례가 끝나자 마자, 그 여자와 그의 젊은 연인 그들은 그린위치(Greenwich)로 갔다. 햇빛을 받은 창문들이 복도들을 얽혔고, 테임즈강까지 뻗은 잔디들은 캐더린에게 친근하였고, 거기서 6주간 동안 헨리의 초조감 속에서, 그들은 궁전 성벽 옆 '프란시스단 엄수파'(the Observant Franciscans)의 수도원에서 조용히 혼인을 하였다. 헨리가 자기의 대관식을 자기 신부와 공유하고, 대관식 전날밤 런던탑에서 동침하는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결심한 것도 이때였다. 그리하여 런던 주민들은 런던탑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에 이르러 태어난 그들의 새 여왕을 제일 먼저 보게 되었다. 여왕은 아주 길게 늘어진 아름답고 보기에 좋은 번뜩이는 머리칼에다, 하얀 공단으로 치장한 처녀 신부의 옷을 입고는, 흰말들 사이로 걸어 매단 황금천의 한 들것 안에 앉아 있었다. (Mattingly, Catherine of Aragon, p.119).


자기 아버지를 독살한 후, 헨리는 캐더린과 혼인하였고, 1509년 6월 24일 즉위하였다. 구약에 나봇(Naboth)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Ahab)과 이세벨(Jezebel) 처럼(열왕기상 21:15-16), 그들은 주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을 지켜보는 자가 아무도 없으며, 자기들의 죄들이 결코 드러나지 않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헨리는 자기 아버지와 정반대였다. 그는 한 '파티 애니멀'(PARTY ANIMAL)었으며, 자기 왕국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그는 울지 추기경(Cardinal Wolsey)과 토마스 모어 경(Sir Thomas More) 같은 광신적 교황제 신봉자들에게 국가의 운영을 내맡겼다.

헨리는 한 가지 일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주 하나님을 향하여 죽음으로부터 피하는 수단들이 있다.' (시편 68:20). 캐더린은 한 남아(男兒) 승계자를 낳지 못했다.


'교회의 바빌론 사로잡힘'의 종말

헨리 8세 통치 중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1517년에 자신의 95개 항의문을 교회문에 못박았을 때, '복받은 개혁'(The Blessed Reformation)이 시작되었다. 헨리는 즉각 그 개혁을 반대하였다.

1521년에, 그는 '일곱 성사의 옹호'(A Defense of the Seven Sacraments) 제목의 책을 썼다. 이것은 1520년에 마틴 루터에 의해서 쓰여진 '교회의 바빌론 사로잡힘'(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을 반론하기 위함이었다. 루터는 헨리를 한 '왕관을 쓴 나귀'(CROWNED ASS)라고 불렀다!!

1517년에 '교회의 바빌론 사로잡힘'이 마칠 때까지 헨리 7세 왕의 수명을 연장시킨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이 총명한 왕은 교황이 가짜 '그리스도'요, 교황이 신세계를 스페인에다 넘길 아무런 권한이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존 카봇의 신대륙 발견으로 인하여, 헨리 7세 왕은 하나님이 그 신세계를 자기와 개혁의 승계자들에게 주셨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왕은 스페인에 도전하여, 강탈하는 스페인의 탄압(종교재판)으로부터 수 백만명의 신세계 원주민들의 목숨을 구하려 했을 것이다.


   
◆아라곤의 캐더린   ◆헨리 8세   ◆앤 불린

<이미지자료/ Martin Hume, The Wives Of Henry The Eighth:The Parts They Played In History, London:Eveleigh Nash, 1905>.


헨리의 아라곤의 캐더린과의 이혼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헨리는 한 '파티 애니멀'(PARTY ANIMAL)이었으며, 아름다운 여자들을 홀리는 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앤 불린은 그러한 아름답고 총명한 여자중 하나였다. 그 여자는 프랑스에서 프란시스 1세(Francis I)의 누이 '바로이스의 마구에릿트'(Marguerite of Valois)의 궁정에서 교육받았다.

캐더린이 한 남아 승계자를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에, 헨리는 그 여자에 대해서 권태를 느끼게 되었고, 그 여자와 이혼하길 원했으며, 대기중인 한 아름답고 지적인 여자 앤 불린과 혼인하길 원했다. 헨리와 앤이 만난 것은 1521년경이었다.

캐더린과 이혼함으로써, 헨리는 스페인의 탄압이 신세계를 정복하고 노예화하는데 있어 하나의 자유로운 손을 지니게 되는 아주 중요한 때에 스페인과 영국과의 동맹관계를 파기하는 것이 되었다.

이 혼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내야 했던 것이다. 헨리 왕이 로마에 대해 짜증이 나고, 자기를 교회의 최고 머리라고 선언할 때까지, 교황은 이혼을 지연시켰고 얼버무렸다. 교회의 머리로서 자신의 새로운 지위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 단두대로 보내졌다. 드디어 헨리와 앤은 1533년 1월 25일 혼인하였다.


앤 불린에 대한 헨리의 연애 편지 로마에 보내지다!!

    앤은 1년이 넘도록 헨리를 불안하게 하였다. 그는 부추겼고 간청하였다. 그는 약속들을 하였고 선물들을 주었다. 무엇보다, 그는 편지들을 썼다. 감성이건 교만이건 간에, 앤은 그의 편지들을 보관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배반당하였다: 어쨌든 두 각기 다른 기간에 속해 있는 편지 중 17통이 절취당하였고 로마로 보내졌으며, 이것이 헨리의 캐더린과의 이혼 반대에 대한 증거가 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도 바티칸 지하 도서관 안에 그 편지들이 남아 있다. 헨리는 거의 확실히 앤이 자기에게 보내 온 편지들을 보관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라졌는데, 이는 앤에 대한 그의 사랑이 증오로 변하고, 매 순간 그 여자를 잊으려 했던 수 년 후에 그가 손수 그것들을 파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부조화 속에 증거가 남아 있다는 것은 그들의 구혼이 일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헨리의 편지들은 그의 감정들의 흔들림이 잘 묘사되어 있다. 반면에, 앤의 감정들은 헨리의 편지들에 대한 그 여자의 답신 속에서 언뜻 나타나 있고, 굴절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Starkey, Six Wives, p.278).

 

이혼을 방해하기 위한 1527년 로마의 약탈!!

캐더린과의 혼인을 백지화시키고, 앤 불린과 혼인하려는 헨리의 모든 움직임이 바티칸에서는 경종으로 받아들여졌다. 헨리 왕이 고의로 아라곤의 캐더린과 이혼하련다는  소식이 스페인 황제 찰스 5세(Emperor Charles V)에게 전해지자, 그가 즉각 반응을 보였다.

그의 군대가 로마를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교황 클레멘트 7세(Pope Clement VII)가 성안겔로 성채(Castle of St. Angelo) 안에 황제의 죄수가 되었다. 찰스 5세는 헨리가 그의 고모 아라곤의 캐더린과 이혼하는 걸 원치 아니하였다. 그는 헨리가 혼인을 백지화하려면 교황으로부터 '한 특면장'(a Dispensation)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군대가 1527년에 로마를 침입한 것이었다. 교황은 성 안겔로 성채 안으로 도피하였고, 황제의 가상(假像)의 죄수가 되었다.

황제의 한 죄수로서, 교황은 헨리에 대한 이혼을 허용 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헨리 왕은 자신이 교황 노릇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영국 안에서 말이다!!

이처럼 헨리 왕이 로마에 대해 짜증이 나고, 자기를 교회의 최고 머리(Supreme HEAD)라고 선언할 때까지, 교황은 이혼을 지연시켰고 얼버무렸다. 영국교회의 머리(HEAD)로서 자신의 새로운 지위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 단두대로 보내졌다.

로마 자신의 '신앙의 방어자'가 이제는 자기의 전 주인에게 등을 돌렸고, 자신을 영국 안의 교황이라 선포하였다. 헨리의 로마와의 파기는 결국에 가서는 영국 안에 종교개혁 (REFORMATION)의 승리로 향하는 그 길을 포장하였다. 그들의 악한 계락들은 예상을 뒤엎었다:

    그가 한 구덩이를 만들었고, 그것을 파놓았으니, 그가 만든 그 썩어가는 도랑(시궁창) 속에 빠져버립니다. 그의 해악은 그의 머리 위로 돌아갈 것이요, 그의 포악(폭력과 강탈과 정의를 어김으로 얻은 상처)은 그 자신의 정수리 위에 내릴 것입니다. (시편 7: 15-16, KJV화중광야역).


1527년 이후부터, 교황권은 완전히 스페인에 의해서 통제받았고, 이탈리아의 '교황들'(Popes)은 단순한 명색에 불과하였다. 1540년에 예수회가 설립되었을 때, 실제의 교황은 예수회 수장(Jesuit General)이었다. 예수회 수장은 <검은 교황>(BLACK POPE)이라 불리웠으니, 이는 그가 항상 검게 옷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하늘 안의 한 여왕

◆1536년 5월 19일 참수당하기 전 5월 6일, 런던탑 감옥 안에서 남편 헨리 8세에게 보낸 성도 앤의 마지막 편지. '왕에게 충성하고 변함없이 성실한 아내'라는 마지막 문구가 메인다. <Henry VIII King of England, Henry VIII To Anne Boleyn: The Love Letters, Mount Vernon(New York):Peter Pauper Press, 1900, p.56>.

앤 여왕은 '천일의 앤'( Anne of the 1,000 days)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그 여자가 1533년부터 1536년까지 겨우 1,000일 동안 통치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여자는 '종교개혁'(Reformation)을 옹호함으로써 로마 카톨릭 성직자들 중에 강력한 대적들을 만들었다.


그 여자는 헨리에게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이 쓴 책 '한 그리스도인의 순종'(The Obedience of a Christian Man) 한 권을 주었다.

틴데일은 영국에서 위대한 인물이었으니, 이는 그가 신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 때문이었다. 이 행위가 헨리 궁전에 있는 교황 옹호자들의 강력한 분노를 야기시켰다.


성도 앤(Saint Anne)이 자기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모든 것은 한 남아 승계자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 여자가 서너 차례 유산을 하였는데, 이것은 그 여자에게 '보르기아의 칸타렐라'(Cantarella of Borgia/비소(砒素)로 만들어진 보르기아의 치명적인 독약의 대명사)가 제공된 것임이 틀림없었다.

성도 앤은 유일하게 생존한 딸 하나가 있었으니, 이 딸이 후에 그 영예스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되었다.


성도 앤은 1536년 5월 19일 런던탑에서 참수당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을 위하여 한 순교자가 되었고, '하늘 안에 한 여왕'이 되었으니, 곧 그리스도와 함께 1,000년을 다스리러 갔다!!

성도 앤 불린((Saint Anne Boleyn)의 유일하게 생존한 딸 엘리자베스는 영국 사상 가장 위대한 여왕이 되었다. 성도 앤은 한 변질된 땅의 왕관을 하나의 영원한 보좌와 거래하였고, 즉시 하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러 갔다:

    그리고 내가 보좌들을 보았고, 그들이 그것들 위에 앉았고, 심판이 그들을 향하여 주어졌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증언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그 말씀 때문에 목베임을 당한 자들의 그 혼들을 보았고, 그들은 그 짐승에게, 그의 형상에게 숭배하지 않았고, 자기들의 이마들 위에  혹은 자기들의 손들 안에 그의 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살면서 다스렸다. (요한계시록 20:4, KJV화중광야역)


앤 불린 여왕의 죽음의 음모자 세 명

토마스 울지 추기경(Cardinal Thomas Wolsey)과 토마스 모어 경(Sir Thomas More)이 페르시아 제국에서 모든 유태인들을 죽이려 하였던 그 사악한 하만(Haman)과 동등한 그 마지막 날들에 있었다. (에스더 7:9-10 참조). 앤 불린 여왕을 죽이는 음모 속에 포함된 자들이 많으나, 이 세 사람들이 그들 중에 속한다.

 

 


토마스 울지 추기경(1475-1530)

 


토마스 모어 경(1478-1535)

 


제인 세이모어 여왕(1509-1537)


제인 세이모어는 앤 불린을 하야시키고 죽이려는 명목을 야기시키려고 교황청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그 여자는 앤 여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궁중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The imperialists were aware of this too, and thus Jane Seymour found herself courted, not only by Henry VIII, but also by Anne's enemies and Chapuys's faction.

    제국주의자들은 이 일을 잘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제인 세이모어가 입궁하게 되었으니, 이는 헨리 8세에 의한 조치였던 것 뿐만 아니라, 앤 불린의 대적들과 샤퓌(Chapuys)의 도당에 의한 것이었다.

The ambassador advised her to drop heavy hints about Anne's heretical leanings in Henry's ear, and to say that the people of England would never accept her as their true Queen. She must say these things in the presence of her supporters, who would all then swear, on their allegiance to the King, that she spoke the truth. Jane certainly acted upon this advice, and it had the desired effect upon the King, who was now receptive to criticism of his wife.

이 칙사 샤퓌는 세이모어에게 헨리의 귀에다 앤의 '이단성 배움'(프로테스탄트)에 관해, 그리고 영국의 국민은 그 여자를 '진짜 여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집중적으로 암시토록 권하였다. 그 여자는 이 일들을, 헨리 8세에게 동맹을 서약할 그의 지지자들 앞에서 자기는 진실을 전하겠다고 말해야만 했다. 제인은 이 충고를 확실히 실행에 옮겼고, 그것이 자기 아내에 대한 비판을 수용한 왕에게 예상대로 효력을 발휘하였다. (Alison Weir, The Six Wives of Henry VIII, New York:Grove Press, 1991, p. 306).


그러나 이 세 명의 음모자들은 모두 곧 죽었다. 울지 추기경은 런던탑으로 가는 도중에 죽었다. 토마스 모어 경은 1535년에 참수당하였다. 그리고 제인 세이모어는 1537년에 아들을 출산하고 죽었다. 이 아들이 에드워드이다. 그런데 이 아들도 1547년(10살)에 헨리 8세를 승계하였다가, 6년 후 1553년에 죽었다. 그리하여 왕위 서열상 앤 보울린의 딸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승계받았고, 영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여왕이 되었다.


아일랜드의 왕, 헨리 8세!!

하이버니아(Hibernia/Ireland의 라틴 이름) 주권(LORDSHIP)은 1155년에 교황의 '라우다빌리터 교서'(Bull Laudabiliter)에 의해서 교황 하드리안 4세 (Pope Hadrian IV)에 의해 노르만인들(바이킹들)에게 주어졌다.

교황들은 '콘스탄틴의 기증'( Donation of Constantine)이라 불리는 하나의 꾸며낸 문서에 의해서 모든 섬들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그 때부터 영국의 왕들은 자신들을 '아일랜드의 주인들'이라 언급하였지, 결코 '아일랜드의 왕들의 직함'으로는 거론하지 않았다. 그것이 헨리 8세 때까지 이어졌다.

1541년에 진부한(무턱대고 도장찍는) 아일랜드 의회가 헨리를 아일랜드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특별히 그것은 교황이 아일랜드 사람들이 '성도 패트릭 성당'(St. Patrick's Cathedral)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킨 이후로, 그들이 항상 로마를 증오하였기 때문이었다.

헨리 8세는 1541년 6월에 자신을 아일랜드의 왕이라 선포하였다:

    '1155년에 이루어진 교황 승인은 헨리 2세가 1172년에 상륙할 때까지 하나의 비밀로 유지되었다. 이토록 영국인은 '콘스탄틴의 기증' 덕택에  로마 교황들이 대양의 모든 섬들의 봉건적 주인들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아일랜드를 지배하게 되었다. 교황 하드리안 4세가 명령을 내린 아일랜드 정복은 '로만불라리움'(Roman Bullarium, 1739) 안에서와, '바로니우스의 연대기' 안에서만 발견된 유명한 한 문서에 의해서 확증된다. 그러나 그 확실한 근거는 로마 카톨릭 역사가들과 프로테스탄트 역사가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져 왔으니, 이는 교황의 '라우다빌리터 교서'(Bull Laudabiliter)가 1188년경에 발행된 기랄두스 캄브렌시스(Giraldus Cambrensis)의 Expugnatio Hibernica 안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이 교서가 1155년에 살리스베리의 요한(John of Salisbury)에 의해 로마로부터 가져 온 문서라고 확인하고 있다. 그는 또한 헨리 2세가 아일랜드를 방문 후, 알렉산더 2세가 확인함을 진술한다. 교황 하드리안의 절친하고 막역한 친구인 살리스베리의 요한도 역시 모든 섬들에 대해서 성도 베드로(St. Peter)의 권리를 근거로 해서 '콘스탄틴의 기증'을 인용하고 있다.'


이 두 문서 이외에도, 알렉산더 3세로부터 온 편지 셋이 있다. 이 편지들은 소위 '재정의 검은 책( Black Book of the Exchequer)으로서 알려진 전사된 헌책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것들 속에는 교황이 헨리의 아일랜드 정복을 은근히 인정함을 표현하고 있으니, 곧 그의 탐험을 하나의 선교적 모험이라 부르며, 교회, 특히 성도 베드로(St. Peter)와 그의 권리들, 즉 성도 베드로가 교황들에게 넘겨준 그 권리들을 지닌 한 챔피온으로 극찬하고 있다. '콘스탄틴의 기증' 하에서 교황들에 의해서 주장된 모든 섬들에 대한 그 권리들, 특별히 헨리에 대한 아일랜드의 승인을 정당화해서가 아니라, 교황에게 자체로 그런 권리들을 주장하도록 권리를 준 사실이 의미를 지닌다. (Manhattan, Vatican Billions, p.47-48).


[살벌한 메어리]

여명이 트기 전에는 항상 칠흙같이 어두운 것처럼, 영국은 아라곤의 캐더린의 딸, 곧 '살벌한(피의) 메어리'(Bloody Mary)가 여왕이 되었을 때, 영국의 역사는 가장 암흑의 시기를 체험하였다.

'살벌한 메어리'는 겨우 5년간(1553-1558) 통치하였지만, 이 기간은 영국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때였다.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카톨릭교에로의 개종을 거절한 이유로 화형당하였다. 여기에는 크랜머 대감독(Archbishop Cranmer), 월세스터의 감독 휴 라티머( Hugh Latimer, Bishop of Worcester), 그리고 로체스터의 감독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 Bishop of Rochester)가 포함되었다.

'살벌한 메어리'는 '레이디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를 런던탑으로 보내 참수시켰다.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도 체포되어 런던탑으로 보내졌다. 그 여자가 죽음으로부터 구해진 것은 하나의 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살벌한 메어리'는 스페인의 필립 2세와 혼인하였으나, 하나의 승계자도 생산치 못하고 자녀없이 죽었다.

그 여자의 이복 자매인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었고, 45년을 통치하였다.


[글로리아나]

글로리아나ㅡ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별칭(Glorianaㅡthe Virgin Queen Elizabeth I)은 1558년 11월 17일에 여왕이 되었다. 그 여자는 45년 동안 통치하였고, 그 기간은 세계 역사상 가장 중대한 시기였다.

그 기간은 스페인과 영국이 세계 지배권을 쟁취하려고 힘겨루기에 갇혀 있던 때였다.

글로리아나는 1570년에 교황 피우스(Pope Pius)에 의해서 파문당했고, 그 여자의 왕국은 '성사수여'(聖事授與/)가 금지되었다. '성사'란 '교회없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만날 수 없고, 성사 없이 하느님과도 상통할 수 없다'는 가톨릭교회에서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주는 종교의식이다. 여기에는 ①세례성사, ②견진성사, ③성체성사, ④고백성사, ⑤병자성사, ⑥신품성사, ⑦혼인성사가 있다. <자세히보기>.

엘리자베스의 통치 중에 프랑스에서는 '성 바돌로뮤 대학살의 날'(St. Bartholomew's Day Massacre), 스페인의 전함 '아르마다'(Armada)의 패배, 세계 일주중인 '프랑스 드레이그 경'(Sir France Drake)에 의한 캘리포니아의 발견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 스코틀랜드의 한 왕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연합시켜서 '대영제국'(GREAT BRITAIN EMPIRE)을 탄생시켰는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엘리자베스 튜더)는 혼인을 하지 않아서 왕위를 물려줄 승계자가 없었다. 그 여자는 친족(아버지 헨리 8세의 누이 마가렛 튜더의 직계)이자 프로테스탄트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왕 6세가 경험상 자기를 계승할 최선의 선택이 되리라 결심하였다.

위 왕가 계보에서 보듯이, 제임스 왕은 잉글랜드의 헨리 7세와 그의 딸 마가렛을 통하여 부계와 모계 양쪽에 잉글랜드의 튜더 왕족들과 연관되어 있다.

▩ 제임스 왕의 어머니 ㅡ 스코틀랜드의 메어리 퀸

  • 잉글랜드의 헨리 7세 요크가 엘리자베스와 혼인하였다.
  • 그들의 딸 마가렛 튜더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왕 4세와 혼인하였다.
  • 그들의 아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가 가이스의 메어리와 혼인하였다.
  • 그들의 딸 스코틀랜드의 메어리 퀸이 로드 단리인 헨리 스츄어트와 혼인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아들이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였다.

▩ 제임스 왕의 아버지 ㅡ 로드 단리(헨리 스튜어트)

  • 잉글랜드의 헨리 7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혼인하였다.
  • 그들의 딸 마가렛 튜더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왕 4세가 죽은 후에 재혼하였다. 그 여자의 새 남편은 앙구스의 경인 아키발드 더글러스였다.
  • 그들의 딸 마가렛 더글러스가 레녹스의 경 매튜 스튜어트와 혼인하였다.
  • 그들의 아들 로드 단리인 헨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의 메어리 퀸과 혼인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아들이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였다.

그런데 일부 비평가들은 '제임스 왕'의 친부가 '로드 단리'(헨리 스튜어트)가 아닌 '제3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계보는 차후에 기회가 주어지면 밝혀질 것이다!!

한편, 영국교회(성공회)는 1568년에 '비숍성경'을 발행하였다. 1602년에 이 성경은 병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헌증한다. 1603년 여왕은 죽었고,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까지 계승하여 '제임스 1세'로 등극하게 되었다. 제임스 왕은 잉글랜드의 선왕인 엘리자베스 1세가 죽기 직전에 헌증된 '비숍성경 1602판'(1602 Bishops' Bible)을 저본으로 하여, 1611년에 모든 일반 국민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을 발행하였으니, 바로 '킹제임스성경'이었다. 아울러, '킹제임스성경'은 '비숍성경 1602판'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위 성경은 언뜻 보기에는 '킹제임스성경'인 듯 보인다. 판형이 <킹제임스성경 1611판>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 성경은 바로 '비숍성경 1602판'이다. 특히 양쪽 난하주 칸에 수기필체(手記筆體)들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킹제임스성경' 교정본의 원본인 것이다. 따라서 '킹제임스성경'은 '비숍성경 1602판'의 '개정판'이란 별칭이 주어지기도 한 것은 퍽이나 설득력을 주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지면, 필자는 이에 관하여 글을 올릴 것이다. 그리하여 '비숍성경 1602판'이 입수되기만을 기도중이다!! <화중광야제공>.

아무튼 청교도들은 사도들의 진실된 계승자들이었다. 그들은 신세계로 건너 갈 비용을 지불하려고 영국 안에 그들이 소유했던 모든 것(EVERYTHING)을 팔았다.

그들은 선택받은 백성(CHOSEN PEOPLE)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유산으로서 세계 안에서 가장 좋은 땅을 주셨으니, 이는 그들이 금을 찾으러 나선 것이 아니라…하나님을 찾아 신세계로 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브리티시 노스 카보티아'의 기초를 놓았으며, 이 기초가 후에 '카보티아 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Cabotia)이 되었다.

1620년에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에 도착한 청교도들. 그들은 '그 반석'(THE ROCK)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그 왕국을 위하여 하나의 상륙 거점을 세웠다.

이미 하나님의 그 왕국을 상징하는 굳건한 해안 교두보인 이 '반석'(ROCK)이 신세계 안에 세워진 이상, 그 무엇으로도 그것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미 새로이 알려진 바와 같이, 2007년에 400주년을 맞은 미국의 버지니아주의 '제임스타운'(Jamestown)은 메사추세츠주의 플리머스(Plymouth)보다 13년 앞서서 1607년에 정착지로서 조성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전한다. 이곳 제임스타운 정착지는 영국의 제임스 왕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였다면, 15세기부터 콜럼버스를 앞세워 본격화된 '남미의 카톨릭화'에 이어서 북미에도 '카톨릭화되었을'(?) 것인데...이처럼 '버지니아 안에 하나님의 섭리가 임하시지 않았다면'...과연 미국이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세계 선교의 교두보가 될 수 있었으며...?? 우리 한반도에도 '그 복음'이 본격적으로 도래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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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Editor's Note]

[부록1] '그리스도인' 가면들을 쓴 배후 사람들  ㅡ 프란시스단(The Franciscans)의 정체!!

프란시스단(The Franciscans)은 예수회의 선인(先人)들이었다. 사실상, 예수회는 실로 '다시 데워진'(warmed-over) 프란시스단이었다.

프란시스단의 창설자 프란세스코 베르나도네(Francesco Bernadone)는 1181년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소도시 앗씨시(Assisi)에서 태어났다. 예수회 설립자 이그나티우스 요욜라(Ignatius LIEola)처럼, 그의 젊은 시절은 술, 여자들과 노래로 보냈다.

요욜라처럼, 그는 이탈리아 라이벌 도시들 간의 한 싸움으로 인하여 투옥되었다. 그 싸움 후에 그는 자신의 부패한 생활에 대하여 생각하는 많은 시간을 가졌으며, 소위 '회심'이 일어났던 것이다.

1209년에 그는 프란시스 수도원을 세웠다. 곧 이어 그 수도원 당시 알려진 세계 속으로 마치 재앙처럼 퍼져 나갔다. 13세기는 암흑기의 한밤중 (MIDNIGHT)이었고, 또한 교황시대의 정오(NOONDAY)였다.

프란시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신약의 한 구절을 읽었다:

    너희는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12:33, 한글개역)

    Sell that ye have, and give alms; provide yourselves bags which wax not old, a treasure in the heavens that faileth not, where no thief approacheth, neither moth corrupteth. (Luke 12:33, KJV)

그는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는 가난(청빈/POVERTY), 순결(독신)과 순종을 기초로 한 수도원 설립하기로 결심하였다. 1209년 동지들을 모아서 당시 교황이었던 인노센트 3세로부터 수도원 설립 허락을 받았다. 교황 그레고리 9세로부터 '성자' 칭호를 받았다.

프란시스가 남긴 유언장에서는 가난과 그들의 이상에 관해 설명하면서 규정과 유언장에다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말기'를 명령함으로써 그들의 가난 이상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선언되고 강조된 가난은 규정들 전체를 통해서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이들 전체 가난을 세종류로 분류해 보면 1) 세상의 소유와 재화로부터의 가난 (물질적 가난), 2) 정신적 가난 (겸손, 순종 등), 3) 영적인 가난 (자기의지의 완전한 포기, 형제사랑 등)의 3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의 물질적 가난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것에 대한 엄격한 제한과 철저한 무소유를 특징으로 한다. 즉 프란시스의 수도사들은 일상 생활에서 필요한 것들을 최소의 것으로 제한해야 한다.

    두 번째의 정신적 가난은 인간에 대한 미덕을 다루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형제는 음식이나 옷을 보고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되며, 또 이것을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수단으로 사용해도 안되며, 되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판단할 것을 명하고 있다. 또한 다른 사람을 향한 태도에서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할 것과, 특히 논쟁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다. 이 내용이 가르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을 향한 태도가 아니라 형제들 자신의 마음 가짐이다.


이렇게 되면 세 번째의 영적인 가난의 의미는 자연히 드러나게 된다. 물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음에 자신의 의지까지 포기한 삶은 남은 것은 '하나님의 그 뜻'(The Will Of God)에 따라 그대로 사는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을 보통 영적인 가난이라고 이름 붙이는데, 이것이 실상 프란시스 개인이나 프란시스 수도원의 특징이자 본질적 이상이 된다. 이 말은 수도원이나 형제들의 가난의 실제가 항상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프란시스단의 가난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자에 대한 자선과 구제에 관해 말씀하는 다른 구절들을 편의상 무시해버렸다:

    너희 구제가 사람들 앞에, 그들에게 보여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하늘 안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상급이 없다. 그러므로 너는 구제할 때, 위선자들이 회당들 안과 길거리들 안에 행하는 것처럼, 네 앞에 나팔을 불지마라. 그들은 사람들의 영광을 가지기 위함이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은 그들의 상급을 받았다. 그러나 네가 구제할 때는 네 오른 손이 행함을 네 왼손이 알지 못하도록 행하라. 곧 네 구제가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은밀함으로 보시는 네 아버지가 네게 공개적으로 갚으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기도할 때, 너는 위선자들처럼 되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회당들 안에와 길거리 모퉁이들 안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함이니, 곧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기 위함이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그들은 그들의 상급을 받았다. 그러나 너는 기도할 때에, 네 닫힌 곳 속으로 들어가고, 네 문을 닫아버렸으면, 은밀함 속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함 안에 보시는 네 아버지가 네게 공개적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1-6, KJV화중광야역)


[부록2] 교황 2010년 9월 영국 방문은 영국 재장악(再掌握)이 목적 ㅡ Papacy Set to Recapture England <자세히보기>

성경을 읽는 민족을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사로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의 원리들이 인간 자유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호레이스 그릴리/1811-1872/미국 신문편집가>

It is impossible to enslave mentally or socially a Bible- reading people. The principles of The Bible are the groundwork of human freedom. <Horace Greeley/1811-1872/American Newspaper Editor>


[필독관련자료] 제임스 왕의 가족 뿌리 [1]
<자세히보기>



<Created/20030224><Modified/20051030><20060402><20090110> <Updated/20091015><201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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