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順從)과 사역(事役)

글/ 정동윤

PROLOGUE ㅡ 나는 학창시절부터 '찬양사역'을 시작했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찬양사역'을 시작했다. 내가 전공하는 음악을 통해, 찬양으로 엘로힘(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 굉장히 뿌듯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모든 일에는 명과 암이 존재하듯,종종 딜레마 즉 내적 갈등에 빠지곤 했다. 그 딜레마인 즉 "내게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되었다. 소위 '사역자'라면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엘로힘(주님)이 내밀하게 감찰하시는 내면이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 없다. 겉과 속이 다르면 막말로 '삯꾼 목자'가 아니겠는가??

목회자는 그리고 사역자는 엘로힘(주님) 앞에서 늘 의인으로서 바로 서 있어야 한다. 내 자신이 공의로우신 엘로힘(주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한 상태에서 누굴 전도하고, 선교하고, 사역하겠는가?? 하지만 말이 쉽지, 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인가?? 결코 녹록지 않다. 남과의 경쟁 보다 내 자신과의 싸움이 훨씬 힘들다는 것은 다들 공감하실 것이다. 내 자신 하나 감당하기도 버겁건만, 남들까지 돌보아야 한다. 아니 나 보다 남을 더 사랑해야 한다. 선하신 목자를 돕는 목동이 되어야 한다. 때로는 양치는 개가 되어, 목숨 걸고 늑대와 싸워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목회가 가장 어렵다. 그래서 사역은 아무나 하나, 아무나 잘해내는 것이 아니다.

수년 전, 한 작은 교중(敎衆=교회)를 시무하시는 어떤 여성 목회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 목회자님은 기도원 사역을 오래 하신 데다, 신학교도 순복음계열을 나오신 터라 그다지 설교에 깊이가 없었다.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주일학교에 온 기분이었으니. 대신 그분은 온 몸과 맘을 다하여 그 동네를 섬겼다. 군대용어로 딱 5분대기조랄까?? 성도와 상담을 하다가도 누군가 '교회'로 뛰어 와 "목사님!! 아무개가 누구집 앞에 쓰러져 있어요." 하니, 뒤도 안 돌아보고 후다닥 뛰어 나가 여인의 몸으로 쓰러져 있던 사람을 끌고 와서는 그가 얼어 죽을까 따뜻한 데에 눕혀 놓았다. 그는 그 교중(敎衆=교회) 성도도 아니었으며, 동네 사람들에게 폐 끼치기로 유명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런 식으로 시도 때도, 밤도 낮도 없이 한 사람, 한 사람 동네 사람들을 섬기다 보니, '시나브로' 목회자님의 작은 교중(敎衆=교회)는 그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크리스투人(크리스천)이 아니어도, 심지어 불교신자도 그 '교회'에서 쉬었다 가곤 했으니. 나는 그 목회자님을 뵙고 '목회'(MINISTRY)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에 대하여 더욱 절감하게 되었고, 누군가 내게 '목회'를 권하면 손을 절레절레 흔들게 되었다.

나는 20여년의 세월을 오롯이 성경번역과 복음문서선교에 매진하신 아버지로부터 성경을 읽는 '영안'을 상속받았다.

성경 어디를 읽더라도 막힘없이 그 내용이 이해가 되니, 이는 분명히 위대한 믿음의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나의 성경지식들이, 내가 깨달은 진리가 내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때가 있다. 신앙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화중광야>(花中曠野)에 글을 게재하는 것에 대하여 늘 큰 부담을 앉고 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연재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부탁에 손사래 치곤 한다.  이 공간이 소소한 일상이나 나누는 곳이라면야 '뭐 그리 부담스럽겠느냐' 만은, 이곳 '화중광야 홈페이지'는 차원이 다른 깊은 깊이로 성경을 연구하고, 그 성과들을 여러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는 곳이다. 게다가 내가 성경을 읽고 깨달은 진리, 받았던 은혜를 나눔은 영성과 직결되기에 더욱 더, 각별히, 조심 또 조심스럽다. 나 역시 연약한 인간인지라 예호바(주님 )앞에 늘 의인일 수는 없다. 아니 늘 죄인이다!! 하루 열두 번씩 '야콥'과 '이스라엘'을 '아랫물'과 '윗물'을 오고 간다. 성도 '파울로스'(바울)의 고백처럼 내 안의 한 다른 법이 나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간다.(로마經 7:23). 사탄은 '참소하는 자'다. 끊임 없이 나를 죄성에 사로잡히게 하고, 참소한다. 그러함에도...그러함에도...갈랄라이(갈릴리)가 귀한 것은 치욘(시온)의 물을 흘려 보내기 때문이 아니던가?? 만약 물을 흘려 보내지 못한다면, 그 물은 사해(死海), 곧 '짜디 짠 죽음의 바다'가 될 것이다. 그런 엘로힘(하나님)의 법칙, 은혜의 섭리에 기대어 부끄러운 자아를 뒤로 하고, 참소하는 자를 견뎌 내며, 애써 용기를 내어 글로써 내가 받았던 은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값 없이 받았기에...

선한 사마리안 비유

지난 번 게재했던 <성도, 카도쉬의 미션>에서 '선한 사마리안' 비유에 대하여 적은 바 있다. <자세히보기/작업중>. 이번에 게재할 글은 지난 번 글과 일맥상통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메시지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호슈아님의 공생애 동안 행하신 이적이나 비유의 말씀들이 하나의 일관된 '주제'가 있음을 뜻한다. 이 글에서는 그 '주제'를 나누고자 한다.

지난 글에서 선한 사마리안은 예호슈아님을 뜻하고, 여관주인은 성도, 강도 만나 쓰러진 자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했다. 예호슈아님의 눈에 사람은 이렇게 두 종류로 나뉘는 것이다. 강도를 만나 목숨이 경각에 닿은 자와 그자를 돌보는 자. 곧 전자는 야콥이요, 후자는 이스라엘이다. 전자는 아랫물에 거하는 자요, 후자는 웃물에 거하는 자이기도 하다. 예호슈아님의 눈에는 그렇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이를 두고 대개 '너희'와 '그들'로 구분하신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Needs'를 충족시켜 주신다. 하여 주로 이적을 행하셨다. 그들은 그렇게 예호슈아님의 보여지는 모습에 열광하였다. 반면 '너희' 곧 제자들, 성도들에게는 하늘의 그 비밀을 선포하셨다. 진리를 가르치신 것이다.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없다. 그런 직분들?? 단지 역할놀이, 계급놀이 좋아하는 인간이 만들어 낸 직분이다. 예호바(하나님)의 눈에는 그저 '너희'와 '그들' 뿐이다. 강도 만나 쓰러진 채, 아니 피를 철철 흘리고 있음에도 자신이 죽어 가는 줄도 모를 텐가?? 아니면 선한 사마리안의 명을 받고, 광야와 같은 인생여정에서 여관주인으로서 '그들'을 돌볼텐가??

'너희'와 '그들'의 고기잡이

이스라엘과 야콥의 차이는 백지장 차이다. 너희와 그들의 차이도 백지장 차이다. 찬양과 기도를 드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았노라' 해놓고 금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아랫물에서 허욱적 거리며 산다. 세상에서 아웅다웅 산다. 그렇게 연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다. 우리만 그런가?? 아니다! 성경 속의 '그들'도 그랬다. 예호바(하나님)으로부터 최초로 '이스라엘'이라 칭함 받았던 야콥도 요제프(요셉)이 애굽에서 보내온 수레를 보고서야 그 영이 소생하여 다시 이스라엘이 되었다. (창세록 45장 참조).

예호슈아님의 제자들 중 으뜸이라 자부하던 '페트로스'(베드로)는 세 번이나 'MASTER'(주님)을 부인했고, 'MASTER'(주님)이 그 나무에 달리시고 난 후에는 다시 본업인 '고기잡이'로 돌아가는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 '너희'에서 '그들'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호슈아를 알아 보지도 못했고, 밤새 그물질을 했으나 동이 트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너희'와 '그들'의 고기잡이에 대하여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것이 <루카經 5장>과 <요안經 21장>이다.

우선 <루카 5:1-7>을 살펴본다:

    5:1And it came to pass, that, as the people pressed upon him to hear the word of God, he stood by the lake of Gennesaret,

    5:1백성(한 군중)이 알로하의 그 말씀을 듣고자 그분을 에워쌌고, 마침 그분은 게네세렛 호숫가에 서 계셨도다.

    [미니풀이] 호숫가에='마태오經, 마르코經, 요안經'에는 '바다'(THE SEA)라고 기록되어 있다.

    5:2And saw two ships standing by the lake: but the fishermen were gone out of them, and were washing their nets.

    5:2그 호숫가(바닷가)에 둔 배 두척을 보셨는데, 그 어부들이 그 배들에서 나왔고, 자기들의 그 그물들을 씻고 있었도다.

    5:3And he entered into one of the ships, which was Simon's, and prayed him that he would thrust out a little from the land. And he sat down, and taught the people out of the ship.

    5:3그리고 예호슈아가 그 배들 중 하나인 시몬 케파스의 배 안으로 들어가셨고, 그에게 육지로부터 그 호수(바다) 안으로 약간 떨어지자고 청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앉으셨고, 그 배에서 백성(군중)을 가르치셨도다.

    5:4Now when he had left speaking, he said unto Simon, Launch out into the deep, and let down your nets for a draught.

    5:4그때 그분이 말씀전함을 마치셨고, 그분이 시몬을 향하여 알리시기를, '깊은 물 쪽으로 가서, 그물들을 내리고 한번 끌어당겨 보거라.' 하셨다.

    5:5And Simon answering said unto him, Master, we have toiled all the night, and have taken nothing: nevertheless at thy word I will let down the net.

    5:5그러자 시몬이 그분을 향하여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는데도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말씀따라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였다.

    5:6And when they had this done, they inclosed a great multitude of fishes: and their net brake.

    5:6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하였더니, 그들이 다량의 물고기들을 잡았는데, 그런데 그들의 그물이 찢어지는 것이었도다.

    5:7And they beckoned unto their partners, which were in the other ship, that they should come and help them. And they came, and filled both the ships, so that they began to sink. (LUKE 5:1-7, King James Version)

    5:7그때 다른 배 안에 있던 그들이 동료들을 향하여 손짓으로 불러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동료들이 왔고, 두 배에 가득채웠는데, 그 배들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이었도다. (루카經 5:1-7, 킹제임스 정재선역)

다음은 <요안 21:1-11>을 살펴본다:

    21:1After these things Jesus shewed himself againto the disciples at the sea of Tiberias; and on this wise shewed he [himself].

    21:1이 일들이 있은 후에 예호슈아님이 디베랴(티베리아스)의 그 바다 위에 다시 그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셨고, 그리고 그 분이 자신을 보이심이 이러하였다.

    21:2There were together SimonPeter, and Thomas called Didymus, and Nathanael of Cana in Galilee, and the [sons] of Zebedee, and two other of his disciples.

    21:2(그곳에는) 시몬 페트로스(베드로)와,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안 카나에서 온 나다나엘과, 세배대의 그 아들들과, 그 분의 제자 다른 둘이 있었다.
    21:3Simon Peter saith unto them,I go a fishing. They say unto him, We also go with thee. They went forth, and entered into a ship immediately; and that night they caught nothing.

    21:3시몬 페트로스가 그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나는 물고기나 잡으로 가겠다.' 하였다. 그들이 그를 향하여 말하기를, '우리도 너와 함께 가겠다.' 하였다. 그들이 나갔고, 즉시 한 배 안으로 올랐다. 그런데 그날 밤에 그들은 아무 것도 낚지 못하였다.

    21:4But when the morning was nowcome, Jesus stood on the shore: but the disciples knew not that it was Jesus.

    21:4그러나 이미 아침이 이르렀고, 예호슈아님이 그 바닷가에 서 계셨다. 그런데도 그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였다.

    21:5Then Jesus saith unto them,Children, have ye any meat? They answered him, No.

    21:5그러자 예호슈아님이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얘들아, 너희에게 물고기가 좀 있느냐?' 하셨다. 그들이 그분에게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하였다.

    21:6And he said unto them, Castthe net on the right side of the ship, and ye shall find. They cast therefore, and now they were not able to draw it for the multitude of fishes.

    21:6그러자 그분이 그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그 그물을 그 배의 오른쪽에 던져보라, (그리하면) 너희가 (물고기를) 잡을 것이다.' 하셨다. 그리하여 그 제자들이 (그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들이 많이 잡혔기에 그 제자들은 그 그물을 더 이상 끌어올릴 수 없었도다.

    21:7Therefore that disciple whomJesus loved saith unto Peter, It is the Lord. Now when Simon Peter heard that it was the Lord, he girt [his] fisher's coat [unto him], (for he was naked,) and did cast himself into the sea.

    21:7그러자 예호슈아님이 사랑하시던 그 제자가 페트로스를 향하여 말하기를, '주님이시다.' 하였다. 그리하여 시몬 페트로스가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는, 그가 자기 겉옷을 걸친 후, (이는 그가 벗고 있었음이라.) 그가 그 바다 속으로 뛰어내렸도다.

    [미니풀이]
    그가 자기 겉옷을 걸친 후, (이는 그가 벗고 있었음이라.)=[겉옷과 속옷의 구별] 헬라원어 '히마티온'(ιματιον/G2440)='겉옷, 외투' ㅡ
    제한적 의미에서 커다란 겉옷이기에, 한 사람이 그 안에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출애굽錄22:26 참조). '속옷, 내의'을 의미하는 '키톤'(χιτων)과는 구별된다. ㅡ 헬라원어 '키톤'(χιτων/G5509)='속옷, 내의' (히브리원어 '케토네트/H3801'에서 유래) ㅡ 두 용어가 한 구절 속에 함께 기록된 용례=<마태오經 5:40. 루카經 6:29. 요안經 19:23. 사도행실錄 9:39>.

    21:8And the other disciples camein a little ship; (for they were not far from land, but as it were two hundred cubits,) dragging the net with fishes.

    21:8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한 작은 배를 탔고, (이는 그들이 육지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이백 큐빗 쯤 됨이라,) 물고기들이 든 그 그물을 끌고서 왔도다.

    21:9As soon then as they werecome to land, they saw a fire of coals there, and fish laid thereon, and bread.

    21:9그리하여 그들이 육지를 향하여 닿자마자, 그들은 거기 숫불 하나가 있음을 보았고, 그 숯불 위에 (구워진) 물고기와, 빵 (한덩이)가 놓여있었다.

    21:10Jesus saith unto them, Bring of the fish which ye have now caught.

    21:10예호슈아님이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방금 잡은 그 물고기들 좀 가져오너라.' 하셨다.

    21:11Simon Peter went up, and drew the net to land full of great fishes, an hundred and fifty and three: and for all there were so many, yet was not the net broken. (JOHN 21:1-11, King James Version)

    21:11시몬 페트로스가 (그 배 쪽으로) 돌아갔고, 그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리니, 큰 물고기들이 가득찼고, 일백 쉰 세 종류였다. 그런데 그렇게 많았는데도, 그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도다. (요안經 21:1-11, 킹제임스 정재선역)

    [미니풀이]  예호슈아의 명(命)을 준행하면, 결실이 맺어진다는 성경적인 이적의 두 가지 실례이다. <요안
    >에는 모두 8가지의 이적(異積)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기록 순서에 따라 이 8가지 이적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조합, 상호연관성을 지닌다. 상세한 번역 및 풀이는 곧 <화중광야>가 발행예정인 <요안經한글번역성경>에서 밝혀질 것이다!! <자세히보기>.

    [부족함을 채워주심]
    첫 번째 이적 ㅡ 카나의 혼인잔치(요안
    2:1-11) ㅡ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호슈아의 명대로 준행함으로써 포도주(물은 물이되 물맛에서 포도주맛이 났다)가 채워졌다. 예호슈아의 영광이 밝히 드러났다.
    여덟 번째 이적 ㅡ 어부들의 어획고(요안
    21:1-14) ㅡ 주님이 없이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헛수고였다. 부활하신 예호슈아님이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는 그 명(命)을 준행하였을 때, 비로서 <153종류>의 물고기들로 채워진 것이다.

    [죽은자를 살려주심]
    두 번째 이적 ㅡ 고관의 아들 고쳐주심(요안
    4:46-50)
    일곱 번째 이적 ㅡ 죽은 나사로 살려주심(요안
    經 11:1-44)

    [불치 병자를 고쳐주심]
    세 번째 이적 ㅡ 38년된 병자 고쳐주심(요안
    4:1-47)
    여섯 번째 이적 ㅡ 날 때부터 소경된 자 고쳐주심(요안
    9:1-41)

    [다른 복음경에도 기록됨]
    네 번째 이적 ㅡ 오천 명을 먹이심(요안
    6:1-14)
    다섯 번째 이적 ㅡ 바다 위를 걸으심(요안
    6:15-21)

이상 두 성경구절은 닮은 듯, 다른 두 상황이다. <루카經>의 상황은 시몬 페트로스(베드로)가 예호슈아님을 만나기 전의 상황이다. 예호슈아께옵서 하늘의 그 진리를 선포하신 '너희'가 아닌, '그들'의 카테고리에 속해 있을 적에 고기를 잡은 상황인 것이다. 예호슈아님의 명에 순종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 많은 물고기를 낚았지만, 그물이 찢어지고 말았다. 그물이 찢어지면 어찌 되는가?? 예호바(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 물들'(THE WATERS) 가운데서 건짐받은 사람들이 다시 그 물들로 돌아가고 만다. 부어주셔도 받아낼 그릇이 못되는 것이다.

반면, <요안經>의 상황은다르다. 비록 세번 예호슈아님을 부인했고, 다시 예전으로 회귀한 듯 보이나, 이미 페트로스는 예호슈아님으로부터 직접 트레이닝 받은 1세대 성도이다. 그런 그가 명에 순종하여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을 때는 <153 종류>라는 정확한 물고기의 숫자가 기록되었고, 그물 또한 찢어지지 않았다. 같은 MASTER(선생님)으로부터 명을 받았고, 똑같이 순종하였지만 '너희'로 사역하는 것과 '그들'로 사역하는 것의 극명한 차이라 하겠다.

누구나 한 번쯤은 '모나미 볼펜의 153>이라는 숫자를 보았을 것이다. 모나미의 창업자인 '송삼석 회장'은 그 숫자를 통해 예호바(하나님)이 기업인의 '상도'를 일깨워 주셨노라고 간증한 바 있다. 한 기업인의 이런 간증도 참 귀한 것이지만, 애석하게도 이는 인간의 시간인 '카이로스' 안에서의 반쪽자리 증거다. 이러한 카이로스 안에서는 기복신앙만 양산될 뿐이다. 좀 더 장성한 크리스투人의 분량에 이르기 위해서는 엘로힘의 시간인 '크로노스'와의 합일이 절실하다 하겠다.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엘로힘'의 사역과 인간의 의지를 존중하시는 '예호바'의 사역이 합일 되어야한다. 참올리브나무에 접붙힘 되어야 한다. 물과 피를 쏟으신 그 골방에 들어가야 한다. 만세반석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비적 연합'(THE MYSTICAL UNION)이다. 이렇게 엘로힘의 주권적 의지와 성도의 선택적 의지가 하나가 될 때에 비로소 엘로힘의 인간구속 프로젝트는 완성되는 것이다.

아울러 '성경수론'이라 불리는 숫자들은 진리를 이해시키기 위한 예호바의 코드일 뿐이니 너무 숫자에 연연치 말고, 진리의 본질을 깨닫고자 노력해야 한다. 지혜는 진리를 깨달으면 저절로 선물처럼 따라 오는 것이니. 그러므로 <153>이라는 숫자 보다는, 그 보다 중요한 포인트는 <153 종류의 물고기들>이 그 물들 가운데서 '건짐받았다'는 것이다. 누가 건졌는가?? 제자들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예호슈아님이 하셨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빈 그물만 걷어올렸다. 아침에 부활하신 예호슈아님이 오셔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명하셨고, 그 명에 순종했을 때에 비로소 역사(役事)는 일어났다. 사람은 그저 그분의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도구가 될 때에,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역사(役事)가 일어난다. 그 물들 가운데서 153종류의 성도들, 잃어버렸던 참십일조들을 건져내기 때문이다.

    ● 사람은 <153 종류의 물고기들>을 그 물들 가운데서 건져 낼 수 없다. 하지만 그분의 명대로 우편에 그물을 던질 수는 있다.

    ● 사람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그분께 순전한 마음으로 오병과 이어를 드릴 수는 있다.

    ● 사람은 흐르는 요단의 물을 멈추게 할 수 없다. 하지만 법궤를 들고 넘실거리는 요단에 발을 담굴 수는 있다.

    ● 사람은 삽시간에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 없다. 하지만 그분의 명에 순종하여 그분께 물을 가져다 드릴 수는 있다.

    ● 사람은 죽은 나사로를 되살릴 수 없다. 하지만 그분의 명에 순종하여 돌문을 굴릴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분은 하실 수 있다. 우리의 의지로 일을 하면 우리가 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분의 의지로 일을 하게 되면 그분이 일하시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에게는 손과 발이 없다. 우리가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 드릴 때, 비로소 그분께서 일하신다. 천 마디 기도 보다 "예!! 주님!!" 이 한 마디를 원하고 계신다. 그런 예스맨을 찾고 계신다. 그분의 마음을 잘 헤아려 드리고, 그분의 생각대로 행하는 손과 발이 되어드리는 것!! 그런 손과 발이 되어줄 의인 10명을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애타게 찾고 계신다. 그분의 잃어버린 손과 발이 되어드리고, 찾아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참다운 의미의 진정한 '참십일조'인 것이다!!

EPILOGUE ㅡ  사역(事役), 곧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하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상환 목사'가 시를 쓰고, '강명식'씨가 곡을 붙힌 <승리>라는 노래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YouTube/듣기>.

    승리가 무엇인 줄 아는가/ 승리가 무엇일 줄 아는가/ 더 좋고 편한 가능성의 유혹을/ 절연히 잘라 버리고/ 오직 주님만 따라 가는 것/ 바로 승리라네

    승리가 무엇인 줄 아는가/ 승리가 무엇인 줄 아는가/ 하고 싶은 말 그 많고 많은 말/ 힘겹게 억누르고/ 오직 주께서만 말씀하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결과가 어떠해도 주님만 빛나시고/ 주님 평안 내 안에 있으면/ 그것이 바로 승리라네

    오,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허옇게 잠재우고/ 오직 주님만 따라가는 것/ 오직 주께서만 말씀하게 하는 것/ 주님만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당신이 알고 있는 허다한 성경지식이 당신을 교만하게 하는가?? 당장 그 잘난 성경읽기를 그만 두시게!!

당신이 올리는 기도가 타인의 신앙을 정죄하게 하는가?? 당장 그 기도를 멈추시게!!

하고 싶은 말, 힘겹게 억누르고, 듣고 싶은 말, 절연히 잘라 버리고, 오직 주님께서 말씀하시게 하고, 오직 주님만 내 안에 살게 하시게!!

그런 삶을 살 때에 비로소 우리는 순전한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 그 위대한 역사(役事)의 도구가 될 것이다. 사역(事役), 곧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하시는 것이다!! 샬롬!! <2016.1.20/깊은밤>

 
 
[필독관련자료] [1] <성도, 곧 '카도쉬'(KADOSCH)의 미션(MISSION/사역)> <자세히보기>.


<CREATED/20160120ㅡUPDATED/20160120><2016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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