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팀례'(Baptism)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신비적연합'을 이루는 하나의 필연적인 통로이다!!

'밥팀례의 오례(誤禮)-Erroneous Method of Baptism'를 읽고서


글/ 안연숙

화중광야 홈페이지에서 메뉴중 'Reformation-Online'에서 '밥팀례의 오례(誤禮)-Erroneous Method of Baptism'을 읽었습니다.

'정재선 목회자님'이 그 글 맨 밑 [편집자주]에서 이런 글을 쓰셨습니다:

    밥팀례'(Baptism)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신비적연합'을 이루는 하나의 필연적인 통로이다!!

저는 이 글을 읽는 동안 계속되는 내적 싸움에서 울고 말았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받았던 그런 물뿌림(적례)을 가지고서는 아무런 변화가 제 속에 있지 아니하였고, 제가 저렇게 물 속에 첨벙 들어간다 할지라도, 이 죄인이 변화받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렇게 물 뿌림과 침례로 구원을 받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의 교회적인 행사로 구원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대단한 양, 들뜨고 그것을 받기위해 '세례문답'을 받았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세례를 받았건만 그 형식을 행하고 나서 그렇게 기쁨에 넘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물에 잠기는 것으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그 생명에로 참여함이 가능한가?' 이것이 이 '밥팀례의 오례'를 읽는 동안 제 안에서의 싸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제자들에게 물에 잠기는 그런 '밥팀례'를 베풀지 않으셨는데? 예수님께서 물에 잠기는 '밥팀례'를 받으셨을 그 때는 예수님께서 '그 나무'에서 돌아가시기 전 아직 율법이 살아있을 때고, 참복음의 그림자 시대가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 속에 잠김과 같이 죽었다 살아나실 것을 말해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단순히 행사로 치루어질 의식이 될 수 없는 것이 '밥팀례'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밥팀례'는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예수님께 기대어, 믿고 의지하여 가는 것입니다.


단회적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나는 매일 죽노라'(I die every day!) (고린도전서 15:31).

물로써 그 말씀을 기념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기 보다는 그것은 '밥팀례'를 대치하기란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자신들에게 물로써 하나님의 그 이름으로 '밥팀례'를 베푼다는 것은 어찌보면 하나님의 자리를 대치하는 불경한 일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태복음 28:19-20> 말씀을 볼 때,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은 물로써 하나님의 그 이름으로 '밥팀례'를 주라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그 말씀을 가르치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따라서 '밥팀례'는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그 말씀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이 그 말씀 속에서 죽고, 즉 우리가 지옥으로 가는, 엠마오로 가는 길을 버리고, 그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 분께서 가신 길로 따라가는 삶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 '밥팀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기를 선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자가 자신을 원하는 솔로몬 왕을 거절하고, 자신의 연인 '그 목자'의 어깨에 기대어 고향으로 귀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고향 곧 하나님 아버지의 그 품으로 말입니다.


                  귀향(歸鄕)


예전에 그 나무 아래서 변치 말자 약속했네
그 이랑 단 둘이 변치말자 약속했네
사람들은 부러워했네 우리 둘만의 사랑을
너무합니다 우리를 갈라 놓았지만

헤어짐 속에서 현란한 세상 속이지만
그 이랑 단 둘이 헤어지지 말자 약속했네
사람들은 염려했네 우리 둘 만의 사랑을
너무합니다 우리를 갈라 놓았지만

지친 내 육체는 잠들었지만 솟구치는 내혼이 있다네
그이랑 단둘이 만나기를 원했네
사람들은 유혹했네 우리 둘 만의 사랑을
너무합니다 우리를 갈라 놓았지만

나는 한 성벽이라 나는 한 문이 아니라
나는 그의 것이요 그는 나의 것이니
사람들은 부러워했네 우리 둘 만의 사랑을
너무합니다 우리를 갈라 놓았지만

그에게 기대어 돌아오는데 그 나무 아래 이르렀네
그 이랑 단 둘이 사랑이 싹트니 하나됐네
사람들은 알았다네 우리 둘 만의 사랑을
너무합니다 우리를 갈라 놓았지만


<아가서> 강해를 마치고/ 정재선 짓다 (2000.6.15)

이 세상의 숱한 유혹 속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말씀 안에 거주하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잖습니까?

예수님 안에 거주하는, 그 말씀 안에 거주하는 자는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고 <시편 1편>에서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가르치는 자가 없이는, 또한 그 말씀을 듣는 자가 없을진대, 이 <마태복음 28:19-20>의 대사명은 지켜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렇게 많은 선교사님들의 수고가 있으셨고, 지금의 그 말씀 가르치시는 분들의 수고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그 말씀을 교회의 전통과 같이 가르친다면 어찌 그 말씀이 바로 설 수 있겠습니까?

몇 천년 지켜왔던 교회의 전통이라고 하면 성경 말씀에서 상고할 생각보다는 기계처럼 그 교회전통을 따르는 것이 바로 우리이지 않습니까? 교회의 전통과 어떤 교리에 얽매이는 우리의 믿음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말씀으로 가는 길이 비록 그 고난의 그 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그 길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성경이 많은 오역과 삭제와 잘못된 사본을 따름으로써,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최적의 성경번역'이 나오기를 이 시간 기도합니다.

2009. 3. 9
다니엘 정의 클라비노바 연주 '사명'을 들으며 '밥티즘'에 대해 묵상하다. / Beth-dian


[사명가사]
주님이 홀로가신 그 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할 그 나무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사명 - 다니엘정

<Created/20090309><Updated/2009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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