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중광야스페셜]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장엄한 인간의 승리 15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 등정한 '에드문드 힐러리' 경의 불굴의 정신!!

'It is not the mountain we conquer, it is ourselves!'
'우리가 정복한 것은 에베레스트 산이 아니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 에드문드 힐러리(Edmund Hillary) -


글/ 정재선 목회자

'...오라, 주님의 그 산과 야콥의 하나님의 그 집으로 올라가자.
그리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자기의 길들을 가르치시겠고,
우리가 그분의 행로(行路)들을 행하겠도다...(미가 4:2, KJV화중광야역)

'...Come, and let us go up to the mountain of the LORD,
and to the house of the God of Jacob; and he will teach us of his ways,
and we will walk in his paths...'(Micah 4:2, KJV)

 


연주/ 다니엘 정

[1]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 합니다

[2]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3]

의심의 안개 걷히고 근심의 구름없는 곳/기쁘고 참된 평화가 거기만 있사옵니다

 후렴-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미니해설] '저 높은 곳'은 이념이나 이상국가, 입신양명 등의 일시적인 영광의 자리가 아니다. 그곳은 '빛나고 높은 곳' '사랑이 넘치는 곳' '의심과 근심이 없는 곳' '기쁘고 참된 평화가 있는 곳' '영원한 복락 누리는 곳' 곧 '하나님의 그 왕국'(The Kingdom of God)을 지칭한다. 성도들은 땅의 것에 현혹되지 말고, 험하고 높은 인생길을 살아가면서 지쳐 절망할 때마다, '저 높은 곳을 항상 바라며, 자신을 각성하는 게기로 삼아야 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그 왕국'에 이를 때까지 계속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Updated/20061211)

[특별기고] 안연숙의 '에베레스트의 정복' 번역 감상록!!
오늘의 한걸음을 귀히 여기는 사람은 내일의 한걸음도 가치 있는 것이다. 'Steady and study, you win the race!' (공부를 꾸준히 하여라, 그러면 경주에서 이길 것이다.) 라는 영어 속담처럼 말이다. 그래서 토끼와 거북이의 구전 동화가 그렇게 많이 읽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릴 때 보다 오히려 커서 그 동화의 내용이 동감이 되는 이유는 '인생은 짧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인 것을 깨달아서 그런 것 같다. 내가 지금 피아노를 잘 못 치지만 그래도 피아노 치는 것을 잊지 않고 아직 치고 있음은 낙심했을지라도 끝까지 피아노를 쳤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하루에 한번은 꼭 있는 것 같다. 내가 포기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앞에 닥친 상황이나 어려움이 너무 싫기 때문인 것 같다. 추운 강풍과 눈과 죽음의 위협과 자신의 의지를 지켜내며 '에베레스트' 산을 오른 사람들이 그래서 그리도 위대한가 보다...



'무기여 잘 있거라' 포스터(1957)와 작가 헤밍웨이가 고교 졸업후 이탈리아 의무대 수송부 근무시절(1918)


왜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려고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렀을까? 20세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의 정복과, 최초 우주선의 달착륙 등 정복의 시대였다.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는 이 시대를 대변하는 소설가이다.
'무기여 잘있거라'(A Farewell To Arms)는 1917년 그가 '오크파크 고등학교' (Oak Park High School/시카고소재)를 졸업한 후, 1차대전 때 이탈리아 전선의무대 수송병으로 자원, 참전을 주제로 한 자서전적 소설이다. 인간이 전쟁을 통해 자연을 정복하려는 불가능을 던져주는 그의 특유의 '니힐리즘'(Nihilism)을 전해 준다. 주인공 헨리 (Frederic Henry) 중위의 '나는 신앙이 없다'(I am not religious)는 고백을 통한 '무신론'이 흐르고 있지만, 인간은 하나님 앞에 무기력한지라, 그 분의 창조물인 자연을 정복한다는 자체가 무용지물이라는 '유신론'을 깨닫게 해줌이 이 작품의 특성임을 김병철 교수님한테서 배웠다. 가끔 필자의 영어영문학과 그 강의실(1307)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고, 두 주연 록 허드슨(Rock Hudson)과 제니퍼 존스(Jennifer Jones)는 이미 고인이 되어 버렸다.


1953년에 지구 최고봉인 에베레스트山 꼭대기를 인류 최초로 올랐던 에드문드 힐러리(Edmund Hillary) 경(卿)이 2008년 1월 11일, 뉴질랜드 수도 오크랜드 시립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최초 등정 이후 약1300명이 에베레스트를 올랐다. 힐러리는 2차 대전 때는 뉴질랜드 공군에서 근무했다. 그는 자연보호 운동가였고 인도주의자였다. 작년에 한 등반대가 사망한 동료를 남겨둔 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을 때 힐러리는 공개적으로 이들을 비판했다.
그 어떤 명예도 생명보다 소중할 수는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뉴질랜드는 힐러리를 국장(國葬)으로 모실 예정이다 뉴질랜드의 명예를 드높인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전국이 반기(半旗)를 달았다. '에베레스트'의 본래 이름은 티벳과 네팔 사이에 자리한 히말라야 15봉이었는데, 측량가 조지 에베레스트(George Everest) 장군의 이름을 따서 '에베레스트'라고 명명한 것이다.

<Updated/20080112>



(
왼쪽부터) 힐러리(Hillary), 영국등반대장 존 헌트 대령(John Hunt)과 텐징(Tenzing)/PA(자료/TheTimes)


1953년 5월 29일 힐러리와 텐징의 에베레스트 정복의 뉴스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관계로 6월 2일에 보도되었다. 헌트 대령과 에드문드 힐러리가 귀국하자 작위를 수여받았다.

에드문드 경이 1958년 남극 횡단여행에 가담 한 후 서너 차례 에베레스트 등반에 참여하였다. 그는 1961년에 세르파 부족을 위해서 하나의 의료 및 교육재단을 설립하였고,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인도 델리 안에서 '인도주재 뉴질랜드 고등판무관'(New Zealand High Commissioner to India)을 역임하였다.

그는 2008년 1월 11일, 88세를 일기로 사망, 1월 21일 뉴질랜드 국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텐징 노르가이는 에베레스트 정복으로  '조지 메달'(George Medal)을 수상하였고, 훗날에는 다르질링(Darjeeling)에서 '히말라야 등산연구소' (Himalayan Mountaineering Institute) 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1986년에 죽었다.

1924년에 정상 등반을 시도하다 사망했던 조지 말로리(George Mallory)의 시신이 67년 후 1991년 에베레스트 산 위에서 발견되었다.

에베레스트 정복 50주년 해인 2003년 5월까지 1,300여명이 세계 지붕의 정상에 올랐다.

그는 세르파(인도 산악지대 거주 부족) 출신 텐징 노르가이(Tenzing Norgay)와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으나 자신의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힐러리는 텐징의 사진만 찍고 십자가를 놓아두고 내려왔다. 텐징은 사진기를 조작하지 못해 힐러리의 모습을 담지 못했다. 두 사람이 정상에 머문 시간은 약15분이었다. 산소통의 산소가 부족했던 것이다.

에드문드 경의 유언 -
'우리가 정복한 것은 에베레스트 산이 아니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면, 당신은 평소 생각하는 당신의 능력 너머로 당신은 종종 자신을 펼칠 수 있다.' (It is not the mountain we conquer, it is ourselves. If you can overcome your fear, you are frequently able to extend yourself far beyond what you normally regard as your ability.)


필자가 힐러리 경(Sir Edmund Hillary)에 대하여 잊을 수 없었던 것은, 대학교 1학년 때 교양영어 교재 안에 수록되어 있던 'The Conquest of Everest'(에베레스트의 정복) 때문이다. 5월달에 대학교에서 처음 치르는 중간고사 영어시험에 이 이야기가 포함된 것으로 기억된다. 같은 등반대원이었던 인도출신 세르파(Sherpa) 텐징(Tenzing Norgay)도 기억이 난다. 마침 필자가 대학 강단에서 가르쳤던 교양영어책들을 뒤져 보았다. 그랬더니, 저자가 바로 혼비(A.S. Hornby)였다. 우리에게는 지금도 서점에 가면 책으로 만나 볼 수 있는 '현대영영사전'(Oxford Advanced learner's Dictionary) 편집자로서 너무나 잘 알려진 분이다:


다음은 혼비의 글 'The Conquest of Everest'이다.
그 당시 이 글 속에 나오는 사건들과 인물들 중심의 사진들을 함께 올린다.



 'The Conquest of Everest'
(에베레스트의 정복)

글/ 혼비(A. S. Hornby)      번역/ 안연숙



Mount Everest, 29,002 feet high, is situated on the border of Tibet and Nepal. Since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climbers have been ambitious to conquer Everest and stand on the highest point of land in the world. On Friday, 29 May 1953, two members of the British Everest Expedition succeeded in reaching the top. They were the first men known to have done so.

29,002 피트(8,844 미터) 높이의 에베레스트 산은 티벳트과 네팔의 국경에 위치해 있다. 19세기 말 이후로 등반가들은 에베레스트를 정복하여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점 위에 서고 싶은 야망을 품어 왔다. 드디어 1953년 5월 29일 금요일에 영국 에베레스트 등반대의 두 명의 회원이 그 정상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그 정상을 정복한 최초의 사람들로 알려졌다.

Before the successful climb of 1953, there had been ten other expeditions. The first attempts were made from the north, after permission  has been obtaine from the ruler of Tibet. The first expeditions were organized jointly by the Alpine Club and the Royal Geographical Society. The aim of the 1921 expedition was to examine the mountain and the surrounding area and to find a route by which later expeditions might hope to reach the top.

1953년의 성공적인 등반 이전에 10개의 다른 등반대들이 있었던 것이다. 제1차 등반들은 티벳트의 지도자로부터 허락을 받은 후에, 북쪽으로부터 시도되었다.  제1차 탐험들은 '알프스 클럽'과 '영국 왕립 지리학회'와 공동으로 조직되었다. 1921년 탐험의 목적은 에베레스트 산과 그 주변 지역을 탐색하여, 훗날에 등반대가 그 정상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의 루트(등산로)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에드문드 경은 '알프스 클럽'과 '영국 왕립 지리학회' 소속회원이었다. 10여명의 등반대원들과
35명의 세르파 가이드들과 350명의 포터들(짐꾼들)이 음식과 장비를 포함해서 18톤의 짐을 옮기고 있다.
(The New York Times Photo Archives)

The climbers were successful in mapping possible routs up to the mountain from the north, the north-east, and the north-west. One of them, george Mallory, reached a highest of over 24,000 feet, and was able to see an immense valley on the south-west side of the mountain. It was from this valley that the climb was made in 1953.

이 등반자들은 북쪽으로부터, 북동쪽으로부터, 그리고 북서쪽으로부터 그 산을 오르는 가능한 루트들을 지도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들 중 한 사람 '조지 멀로리'가 24,000 피트(7,322 미터) 높이에 도달하였고, 그 산의 남쪽에 펼쳐진 하나의 광활한 계곡을 볼 수 있었다. 1953년에 이루어진 등반은 바로 이 계곡으로부터였다.


The expedition of 1924 again approached the mountain from the north. Two of the climbers, Mallory and Irvine, set up a camp at 26,800 feet. From this camp they sent back a message saying that the wearther was good and that they hoped to reach the top and get back to their tent the next day. They were seen the next afternoon through a break in the clouds at a height of about 28,230 feet. They did not return to their tent, and the weather made it impossible for the other climbers to go to their help. It is impossible to know whether they got to the top. Mallory's ice-ax was found nine years later by members of another expedition.

1924년의 등반은 북쪽으로부터 그 산을 접근하였다. 등반대원 중 두 사람 '멀로리'와 '어빈'이 26,800 피트(8,173 미터)에서 한 캠프를 설치하였다. 이 캠프로부터 그들은 날씨가 좋았고, 다음날이면 정상에 도달해서 텐트로 돌아가고 싶다는 메세지를 보내왔다. 그들은 28,230 피트(8,610미터)의 높이에서 한 구름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그들의 텐트로 돌아오지 못했고, 다른 등반대원들이 올라가서 그들을 구조하는데 날씨가 불가능했다. 그들이 정상에 도달했는지는 알기가 불가능하다. '멀로리'의 얼음도끼가 9년 후에 다른 등반대원들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1924년 '북쪽 안부(鞍部)'에서 마지막 등정을 위해 캠프를 떠나는 조지 멀로리(왼쪽)과 앤드류 어번
(사진/AP/John Noel (http://commentisfree.guardian.co.uk)

After the end of the Second World War, Everest expeditions, unable to enter Tibet, had to start from Nepal. In 1951 a British expedition, led by Eric Shipton, found a way into the immense valley to the south-west of the mountain, the valley that had been seen in the distance by Mallory thirty years earlier. In the following years Swiss climbers again entered this valley, and proved that from it there was a route that might be followed to the top of the mountain. The exploration and mapmaking of these earlier expeditions were of the greatest value to the men who won success in 1953.

2차대전이 끝난 후에, 티벳트로 들어갈 수 없게 된 에베레스트 등반대들은 네팔로부터 시작해야 했다. 1951년에 '에릭 쉬프톤'이 이끄는 한 영국 탐험대가 에베레스트 산의 남서쪽에 이르는 그 광활한 계곡으로 이어지는 한 길을 발견했는데, 이곳은 바로 '멀로리'에 의해서 30년전에 멀리서 보여졌던 바로 그 계곡이였다. 그 다음 해부터 계속해서 스위스 등반대원들이 다시 이 계곡으로 들어갔고, 그 곳으로부터 산정상에로 이어질 것 같은 하나의 루트가 있음이 입증되었다. 이러한 초기 등반대들의 답사와 지도가 1953년에 성공을 거둔 사람들에게는 가장 커다란 가치가 되었다.

Snow and ice are not the climber's greatest enemies of Everest. Climbers in the Alps learnt long ago how to overcome the dangers of snow and ice.
One of the greatest difficulties on Everest is the effect on the human body and mind of making any kind of effort at such immense heights. On the last thousand feet of Everest, between 28,000 and 29,000 feet, the amount of oxygen in the air is only about one-third of the amount at sea-level. The latest expeditions have taken with them supplies of artificial oxygen. This helped them to reach the top, even though the weight of the apparatus was an extra burden.

눈과 얼음이 에베레스트의 등반대원의 최대 적(敵)이 아니었다. 알프스의 등반대원들은 오래 전부터 눈과 얼음의 위험들을 이겨내는 방법을 배웠다. 에베레스트의 최대 난제중 하나는 그러한 광활한 높이에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는 인간의 몸과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다. 마지막 천 피트인 28,000 피트와 29,000 피트 사이에는 대기 속의 산소양이 해면의 양의 3분의 1밖에 안된다. 최근의 등반대들은 인공산소를 공급받아 왔다. 이러한 도움으로 그 산소도구의 무게가 별도의 짐이 될지라도 정상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었다.

Another very serious difficulty is the climate. There are only tow very short periods each year when climbing is possible. These are the three weeks before and after the summer monsoon. This monsoon  is the season during which the south-west wind blows from the Indian Ocean, bringing rain to India, and covering the Himalayas with deep soft snow. After the monsoon the days are short. The three weeks before mid-June, therefore, are the best for making the attempt.

또 하나의 심각한 난관은 기후이다. 등반이 가능한 때는 1년 중, 심히 짧은 두 기간이 있다. 이 기간들은 여름 몬순계절 전후 3주이다. 이 몬순은 인도양으로부터 남서풍이 불어오는 계절풍으로서 인도에 비를 가져오며, 히말라야를 부드러운 눈으로 덮어준다. 몬순이 지난 후에는 낮이 짧다. 그래서 6월 중순 중 3주가 등반의 최적기이다.

Members of Everest expeditions must acclimatize themselves. They must get used to the thin air of the Himalayan heights. They must get used to the thin air of the Himalayan heights. They do this by spending as many weeks as possible in the high mountain country. They must also test and get used to the oxygen apparatus.

에베레스트 등반대들의 대원들은 스스로 적응해야만 한다. 그들은 히말라야의 고원 지대의 희박한 공기에 적응해야 한다. 그들은 고원지대 나라에서 가능한 여러 주일을 보내면서 이것에 적응한다. 그들은 산소도구를 시험하고, 익숙되어야 한다.

The leader of the 1953 expedition was Colonel John Hunt. He chose eleven men to go with him as climbers: eight from Britain, two from New Zealand, and one man, Tenzing Norkay, a Sherpa, who had been with the Swiss expedition 1952. Tenzing was a professional mountaineer from Darjeeling in India. The Sherpas are a tribe of hillmen who live in the valleys of northern Nepal For more than fifty years they have been employed as porters for Himalayan expeditions.

1953년 등반대의 대장은 '존 헌트' 대령이었다. 그는 자신과 함께 동행할 등반대원들로서 11명을 선출하였다. 8명은 영국출신, 2명은 뉴질랜드 출신, 1명은 세루파로서, 1952년 스위스 등반대에 참여했던 '텐징 노르가이'였다. 텐징은 인도 다르지링 출신으로서 전문 산악인이었다. '세루파'(A clan of people originally from Tibet who live along Nepal's mountainous eastern border with Tibet)는 북부네팔의 계곡에서 살고있는 산악인 부족이었다. 50년이상을 그들은 히말라야 탐험대를 위한 포터(짐꾼)로서 채용되었다.


It was in early March that the members of the expedition reached Katmandu, the capital of Nepal. From Katmandu to Everest is 150 miles of rough, mountainous country. There are no good roads, so the long journey had to be made on foot. A large number of porters were needed to carry the expedition's supplies. When the expedition left Katmandu, the party numbered more than 350. The march to the place where the rear base was to be set up took 16 days. Each night tents were put up near a village. At the end of the journey, as the party turned a corner on the winding path, they saw Everest in front of them.

등반대원들이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한 것은 3월초였다.  카트만두로부터 에베레스트까지는 150마일(240키로)의 황량한 산악지역이다. 도로들이 좋지 않았음으로 장거리 여행은 도보로 이루어 져야 했다. 등반대에 물자들을 운반하는 데는 많은 수의 포터들(짐꾼들/A person who carries supplies)이 필요했다. 등반대가 카트만두를 떠났을 때 일행의 수는 350명이 넘었다. 후방 베이스까지의 행군은 16일이 걸려야만 했다. 밤마다 한 마을 부근에 텐트들을 쳤다. 여행이 끝나는 날, 구부러진 길 모퉁이를 돌자마자, 그들 앞에 펼쳐지는 에베레스트를 보았다.

The rear base was about 20miles south of Everest. Here most of the porters were sent back, but many of the Sherpas were kept to carry supplies to the camps that must be set up at places between this base and the last camp near the summit.

후방 베이스(기지)는 에베레스트 남쪽으로부터 약 20마일(32키로) 거리였다. 여기서부터 대부분의 포터들은 돌아갔다. 그러나 많은 세르파들이 남아서 여기 베이스 캠프와 정상부근의 마지막 캠프 사이에서 필요한 물자들을 운반 하였다.


The climbers spent the first fortnight in the mountainous area near the rear base. This was for the purpose of acclimatization. They also had to test the oxygen apparatus again, and to get used to breathing through it. If it went wrong, if any part of it was out of order, death might follow. The Sherpa porters also had to learn how to use the apparatus. Both climbers and porters had to get used to climbing with large oxygen cylinders strapped to their backs as well as heavy loads of food and clothing.

후방 베이스 부근의 산악지역에서 등반대원들은 마지막 2주일을 보냈다. 이것은 적응을 위한 목적이었다. 그들은 또 다시 산소기구를 테스트 하였고, 그것을 통하여 호흡을 조절할 수 있도록 익숙해져야 했다. 만일 그 산소통이 작동이 안 되거나, 만일 그 산소통의 여한한 부분이 고장이 날 경우에는 죽음이 따를 뿐이었다. 세르파 포터들도, 산소통 사용법을 배워야 했다. 등반대원들과 포터들 양측은 커다란 산소통을 음식과 의복의 무거운 짐과 함께 그들의 등에 메고, 등산에 익숙해야만 했다.

From the rear base the members of the party had to make their way up a valley. The upper part of this valley becomes the glacier of Khumbu, and on this glacier was one of the most difficult parts of the route to the summit. This was a wall of broken ice called the Khumbu ice-fall. The Swiss expedition had climbed this in the previous year, but the ice-fall had changed, and a new way had to be found up this rough wall of dangerous ice.

후방 베이스로부터 등반대원들은 한 계곡으로 올라가는 길을 만들어야 했다. 이 계곡의 상단 부분이 '쿰부 빙하'가 된다. 이 빙하가 정상으로 향하는 루트 가운데서 가장 험난한 곳 중의 하나였다. 이것은 '쿰부 얼음폭포'라고 불리우는 얼음이 갈라진 벽이었다. 스위스 등반대가 전년(1952년)에 이곳을 등반하였으나, 얼음폭포가 변해버렸기에 이 위험한 얼음 벽을 향하는 하나의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했다.

A base camp was set up on the glacier at about 18,000 feet. More of the porters were now sent back, and only 34 of the Sherpas stayed behind with the climbers. These men had the hard work of carrying supplies to still higher camps. A party of climbers found a way up the ice-fall. A route to the top was made for the porters by placing ropes or rope ladders in dangerous places, and light metal ladders across wide breaks in the ice.

'베이스 캠프'(A central setup of tents where food, equipment, and medical supplies are stored; a relay site for climbers)가 약18,000 피트(5,494 미터)에서 빙하 위에 설치되었다. 지금은 많은 포터들이 돌아갔다. 세르파 중 34명만이 등반대원들과 함께 남아있었다. 이 사람들은 높은 지역의 캠프에까지 물자들을 운반해주는 힘든 일을 맡았다. 등반대원들의 일행은 '얼음폭포'(A cascade of ice that results when a glacier descends over a changing slope of ground beneath)로 올라가는 길을 발견했다. 정상으로 가는 루트는 포터들이 로프를 설치하거나 위험한 지역에다 로프 사다리를 놓거나, 얼음 사이에 넓은 갈라진 곳에 가벼운 금속 사다리를 놓았다.



Camp Two was set up half-way up the ice-fall, and Camp Three at the top. By the end of April the climbers had reached the high valley that Mallory had seen 32 years earlier, and that members of the Swiss Expedition had entered the previous year. The highest point of Everest, the North Summit, was to the north, and to the east was the South Col, 26,000 feet high, which must be reached before the final attempt on Everest could be made.

'제2캠프'가 '얼음폭포'로 가는 중간 길에 설치되었고, '제3캠프'가 정상에 설치되었다. 4월말이 되자, 등반대원들은 32년전에 '멀로리'가 보았고, 전년(1952년)에 스위스 등반대 대원들이 들어갔던 바로 그 높은 계곡에 다다랐던 것이다. 에베레스트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북쪽정상은 북쪽에 있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26,000 피트(7,933 미터) 높이의
'남쪽 안부(鞍部)'(A depression or pass in a mountain range)가 있었다. 이곳은 에베레스트의 마지막 등반 이전에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1952년 가을 스위스 등반대원들/ 왼쪽부터 에른스트 라이스(Ernst Reiss),
텐징 노르가이(Tenzing Norgay), 구스타베 그로스(Gustave Gross),
노르만 디렌푸르스(Norman Dyhrenfurth),  아더 슈페헬(Arthur Spöhel),
그리고 가브리엘 체바레이(Gabriel Chevalley). 1953년의 정상 정복은
1952년에 참가했던 텐징 노르가이(왼쪽 두 번째)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Colonel Hunt and some of his companions, now using oxygen, explored the rocky walls of this valley. Camp Four had been set up in the northern side of the valley. Three more camps were set up between Camp Four and the South Col. Hunt had chosen four men to make the final attempt. The other climbers and porters had the work of helping them to get supplies as high as possible. Parties of men made their way up the ice-fall. Tents, sleeping-bags, food, cookers, oxygen cylinders-all had to be carried up for use in the higher camps. Portable radio sets, or 'walkie-talkies', were used by those in the higher camps to tell those in the lower camps of their needs.

헌트 대령과 그의 등반대원 일부는 이제부터 산소를 사용하면서 이 계곡의 암반 벽을 답사하였다. '제4캠프'가 이 계곡의 북쪽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제4캠프'와 '남쪽 안부(鞍部)' 사이에는 3개의 캠프가 더 설치되었다. 헌트는 마지막 등반을 시도하기 위해서 4명을 선출하였다. 다른 등반대원들과 포터들은 그들로 하여금 가능한 높은 곳까지 물품들을 옮겨주는 힘든 일을 도왔다. 등반대 일행들은 '얼음폭포'로까지 올라가는 길을 만들었다. 텐트들과 침낭들과 음식과 취사도구와 산소통이 높은 캠프에서 사용되도록 운반되어야만 했다. 이동용 라디오 혹은 '무전기들'(워키토키들)이 높은 캠프에서 낮은 캠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항을 알려주는데 사용되었다.

Towards the end of May Camp Eight had been set up successfully on the South Col. Of the 360 porters who had set out from Katmandu, only 19 were now with the climbers. On 26 May Colonel Hunt and three others left Camp Eight and made a difficult climb to a height of 27,350 feet. On the way they passed, at about 27,200 feet, the point where the Swiss guide Lambert and the Sherpa Tenzing Norkay had passed a terrible night on 28 May in the previous year, the night before their attempt on the summit. Hunt and his companions left supplies there for the next party. Two days later, the New Zealander Hillary, and the Sherpa Tenzing Norkay, with three others, left the South Col to find a site for the last camp.

5월의 마지막에 이르자 '제8캠프'가 '남쪽 안부(鞍部)'에 성공적으로 설치되었다. 카트만두로부터 출발했던 360명의 포터들 중에 지금은 19명만이 등반대원들과 함께 남아 있었다. 5월 26일 헌트 대령과 다른 대원 3명이 '제8캠프'를 떠났고, 27,350 피트(8,342 미터) 높이의 험준한 등반을 시도하였다. 그들이 통과하는 도중에 그들은 전년(1952년) 5월 28일에 스위스 가이드 '램버트'와 세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정상을 시도하기 전날 밤인 5월 28일, 그 끔찍한 밤을 보냈던 약 27,200 피트(8,273 미터) 지점을 통과했다. 헌트와 그의 동료들은 다음 대원들을 위해서 그곳에 물품을 남겨놓았다. 이틀 후에 뉴질랜드인 '힐러리'와 세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다른 대원 3사람과 함께 마지막 캠프 부지를 찾으러 '남쪽 안부(鞍部)'를 떠났다.


The way was very steep and difficult, and each climber was carrying about 60 1b. The supplies left by Hunt's party two days earlier were found and picked up. Finally, at 27,900 feet, a site for Camp Nine was chosen. A tent was set up, Hillary and Tenzing remained there, and the three others went down to Camp Eight on the South Col.

그 길은 심히 가파르고 험난하였고, 등반대원 각자가 약 60 파운드(27 킬로그램)의 물건을 운반하고 있었다. 이틀 전에 헌트 일행이 남겨놓은 물품들이 발견되었다. 마지막으로 27,200 피트(8,273 미터)에서 '제9캠프'의 부지가 선정되었다. 텐트 한 개가 설치되었고, 힐러리와 텐징은 거기에 남았고, 다른 세 명의 대원들은 '남쪽 안부(鞍部)'에 있는 '제8캠프'로 하산하였다



27,500피트(8,273 미터)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 힐러리와 텐징. 각자가 산소도구를 포함한 약 27킬로그램 무게의 짐을 지고서 오르고 있다. 이 사진은 '제8캠프'에서 다른 대원 3사람과 함께 마지막 캠프 부지를 찾으러 '남쪽 안부(鞍部)'를 떠나는 도중 '남동 산마루'(South East ridge)에서 찍은 것이다.(영국 '왕립지리학회' 제공)

During the night Hillary and Tenzing had a short sleep, helped by a little oxygen. The temperature inside the tent was minus 27 degrees Centigrade. At six o'clock they left the tent and started out in calm, clear weather. They took it in turns to cut steps in the ice and so make a path. At nine o'clock the men watching from the South Col saw the two climbers on the South Summit, a point about 500 feet below the north Summit. Then they were hidden from view.

그 날밤 동안, 힐러리와 텐징은 약간의 산소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짧은 잠을 잤다. 텐트 내의 온도는 섭씨 영하 27도였다. 아침 6시에, 그들은 텐트를 떠났고, 고요하고 맑은 날씨 속에서 출발하였다. 그들은 교대로 얼음 속에 계단을 만들면서 한 길을 만들어 갔다. 9시에, '남쪽 안부(鞍部)'로부터 지켜보던 대원들은 그 두 사람이 '북쪽 정상' 약 500 피트(1,500 미터) 아래에 위치한 '남쪽 정상'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후로 그들은 시야로부터 사라졌다.


Higher and higher the two men climbed, roped together. Each step forward needed an immense effort of body and mind. At 11:30 on the morning of 29 May 1953, they stood on the North Summit of Everest.

그 두 사람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함께 로프에 의지하였다. 한 발자국 오를 때마다 몸과 정신의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드디어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에, 그들은 에베레스트의 '북쪽 정상' 위에 우뚝 섰다.

The success of the 1953 expedition was a triumph for its members, but it was a triumph that was shared by members of all previous expeditions. It was the experience, won by hard effort, of earlier climbers, including those of the Swiss expedition of 1952, that made success possible in 1953.

1953년의 등반대의 성공은 그 대원들을 위한 승리였지만, 그 이전의 모든 등반대들의 대원들과 함께 나눈 하나의 승리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1953년에 등반의 성공을 가능케 해준 1952년의 스위스 등반대의 대원들을 포함해서, 초기 등반대원들의 인고(忍苦)로 이겨낸 승리의 체험이었다.


<Updated/20080115>



['에베레스트의 정복' 번역을 마치고...김상록]

나는 이 글을 번역하면서 등반에 대한 나의 편견을 버릴 수 있었다. '왜 사서 고생하며 굳이 높은 산을 오르려 하는가?' 늘 이해가 안되었었기 때문이었다. 산에 오르지 않아도 할 일도 많고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텔레비전에 나올 때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발자국도 더 떼기 힘든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산 정상을 올랐다는 것은 때론 힘든 인생을 살아갈 때 귀감이 될 것 같다. 아울러 험한 곳을 탐험하는 등반가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너무나도 다른 길들을 가고 있을 때가 많지만, 어느 길이든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사람들처럼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가 잘 모르는 '노점상' 하시는 분들은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부끄러움을 이겨야 되고, 춥거나 더운 것을 이겨야 하며, 손님을 기다려야 하는 수고를 견뎌야 한다. 인내가 필요한 것은 모든 일에도 마찬가지이다. 가끔 우물 안의 개구리 식으로 자신의 길이 제일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지나가는 노점상들의 어려움만도 못할 때가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눈 덮인 '에베레스트'에 길을 만들고 지도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훗날 사람들을 위해 기록을 잘 해 두었다. 지금 우리가 다니고 있는 도로도 누군가의 섬김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주고 도움 받고 살고 있다. 인간으로서 살아내기가 얼마나 각박한 세상인가? 동물들은 말 할 필요없이 더더욱 그러하지만 말이다. 엄청난 오염과 범죄들과 사고들 속에서 하루 하루 목숨을 유지 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살지 않으면 안된다.

가르치면서 배운 교훈이 있는데, 누구나 익히는 속도는 다르지만 포기하지 않는 다면 언젠가는 배움이 빨랐던 사람이나 느렸던 사람이나 같아진다는 것이다. 토끼와 거북이처럼 말이다. 서양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한다: 'Steady and study, you win the race! - 공부를 꾸준히 하여라, 그러면 경주에서 이길 것이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재능이 좋아서 피아노 치던 아이들도 나중에는 못하는 사람이 많다. 중간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우는 사람에게 선생님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좌절하지 않도록, 좌절할지라도 더 나은 길로 갈 수 있도록 훈련을 도와주는 것이다. 가끔씩 피아노를 그만두고 싶을 때, 스스로를 위로한다. 계속 하면 원하는 음악을 할 수 있을꺼야. 주변에서 야유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올해로 20년째 피아노만 치고 있는데 나에게는 내세울만한 자격이 없다. 예술고등학교라든지, 예술대학이라든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원래 못하지만, 더 움츠러 들 수 밖에 없다. 만약 내가 정상적인 음악교육과정을 밟았더라면 상당히 교만한 사람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아직도 나는 레슨을 받고 있다. 선생님도 나에게 하나도 늘지 않았다고 늘 책망 하신다. 늘 조용히 도와주시던 어머니도 네가 한 달에 쓰는 돈이 얼마나 되는 줄 아냐고? 네가 피아노 해서 무슨 성과가 있었냐고? 오늘도 반문해 오신다. 시원스레 연습하고 싶을 때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전공이 달랐고, 눈치밥 먹으며 음대의 연습실을 이용하곤 하였다. 그러다 두 번 정도 쫓겨난 것 같다. 하지만 마음속에 음악이 떠오르면 피아노를 치고 싶은 생각이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여 염치 불구하고 쫓겨나도 또 들어가서 연습하곤 했던 것이었다.

내가 피아노를 사랑하여 이렇듯 모든 어려움을 딛고 잘치든 못치든 잡고 있는 것처럼…어쩌면 '에베레스트' 산을 올랐던 정상을 오르고 싶었던 저분들의 마음도 그렇지 않았나… 짐작해 본다. 정상에 올랐던지 오르지 못했던 사람들이나 모두 자신이 원하는 길을 끝까지 간 것이기에 귀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 사람들의 기록은 후대 그 산을 등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편히 오를 수 있는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피아노를 계속 잡고 있는 이유는 나의 꿈이 '피아노 기능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치고 싶은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었고, 또한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을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이 꿈을 꾸었었다. 그때는 내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서 유명해져서 복음을 전하고픈 욕심이 있었으나, 내가 계획했던 데로 된 적은 없었다.

중학교 3학년때부터 피아노 시험을 위해 3년간이나 온갖 노력을 다 쏟았는데, 내 속사람의 응답이 없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올네이션스 기능인 경배와 찬양' 수련회에서 신학을 하고픈 마음이 들었었다. 아울러 'AN 아카데미' 라고 경배와 찬양에서 하는 실용음악 학원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무척이나 공부하고 싶었지만 집이 지방이고, 아직 어리기에 마음을 접고 대학가서 꼭 배우리라 생각을 했었다.

하나님께 기도했었다. 만약 피아노 말고, 신학을 공부하게 하시려면 우리집이 못살게 되서 레슨 못받게 해달라고 말이다. 정말 얼마 후에 IMF가 터져서 우리 부모님께서 투자하신 OO 파이낸스가 부도가 나버렸다. 나의 겁쟁이 같은 기도 덕분에 우리 집은 한동안 가난해야만 했었다.

대학교 2학년 올라가기 전 혹시 타과 부전공, 특히 피아노과 전공이 가능할까? 피아노 학과장님에게 찾아갔다가 절대 안된다는 말을 듣고, 실망해서 1시간 내내 피아노 치면서 울었었다.

그때부터 나의 방황은 또 다시 시작되었었다. 심지어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피아노 입시 준비를 하고픈 생각마저 들었었다. 그러다 미국 CCC 본부에 단체로 갈 기회가 생겨서 신청했었는데, 같이 가려던 친구가 못가게 되어서 나도 그냥 포기해 버렸다. 미국보다 친구와의 우정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고, '2002 올네이션스 기능인 경배와 찬양' 수련회를 가게 되었었다. 피아노를 더 배우기 위한 하나의 돌파구였다고 해야 할까?

거기서 피아노를 공부할 때 지금의 선생님께서 시범 연주자로 나오셨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때 부터 경배와 찬양에서 운영하는 'AN 아카데미'에서 배우고 싶었었는데, 수련회장에서 만난 같은 지방 사람, 같은 나이인 자매가 서울까지 올라가서 지금 앞에서 연주하는 사람에게 배운다고 해서 나는 그 친구에게 부탁해서 나를 좀 소개시켜 달라고 했었다. 그래서 그때 짧게 소개받고 배우고 싶다고 하였었다. 그 후 2개월 후 학교가 다시 개강하고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동안에도 나는 서울에 가서 배우고 싶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피아노를 전공하지 못하였고, 끝까지 하지 못하였다는 나의 안타까움이 먼 곳까지 가서 배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만들었었다. 부모님도 그런 나를 후원해 주셨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2개월 후 그 학원을 그만 두셨고, 나는 다른 선생님에게 한달을 더 배우다가 몸이 힘들고, 아버지께서 돈 너무 많이 든다고 그만두게 하셔서 배우는 것을 쉬게 되었었다.

선생님은 친구분과 함께 '다음 까페'를 만드셨고, 나는 그곳에 회원으로 활동하였었다. 나는 워낙 사람들을 좋아하는 지라, 까페 있는 사람들과 채팅도 자주 하고 그랬었다. 그러다 그 까페 운영자 분들중 선생님의 아버지께서 계셨는데, 목회자님이셨다. 나는 나름 신학생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선생님 아버지께서 운영자로서 전체 메일 보낸 것에 대한 답신을 장황하게 써서 보냈다.

나의 꿈은 '피아노 기능 선교사' 인데요. 라며, 구구절절히 인생에 대한 상담을 받고자 써써 보냈었던 것이었다. 정말 답답했던 시기였기에 말이다. 그런데 그 메일에 선생님 아버지께서는 더 장황히 장문의 메일을 보내오셨다. 그리고 나의 특유의 인사성 때문에 선생님 아버지께서 들어오시면 채팅으로 인사를 건네곤 했었다. 그런데 밤에 카페에 들어오셨기에 채팅으로 인사를 건넸었는데, 그 대화가 장장 4시간이나 지속되었었다.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라는 유명한 성경구절을 풀어주시는데 거기에 충격을 받았었다. '사랑' 대신에 '예수님'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풀어주시는 목회자님들이 없기에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목회자님과 채팅을 했었다.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오래참을 수 있느냐? 인내할 수 있느냐? 예수님이 오래참으시고 인내하시지. 사람의 사랑은 항상 변덕이 심하다.'고 하시면서 <고린도 전서 13장>을 풀어주셨다.

나는 이 목회자님께 성경을 배워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목회자님 계신 곳을 물어서 다짜고짜 찾아갔었다. 오지 말라는 멜을 보내셨다는데 간다고 열어보지도 않았었다. 그때부터 내 삶은 하나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피아노 때문에 패배의식에 늘 사로잡혀서 홧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모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그 말씀을 위해 살겠다.' 라는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긴 것이었다.

목회자님은 영어성경인 <킹제임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시는 일을 하셨다. 지금의 <한글개역성경>은 틀린 번역이 많고 빠진 부분이 많고, 또 <킹제임스성경>과는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안티옥(다수사본)-사도 바울과 안티옥 성도들이 쓰던 성경, 초기 성도들이 많이 읽었기에 사본이 많이 남아 있음'

'알렉산드리아(소수사본)-배도의 근원지, 원본에서 많이 삭제하고 오류를 가진 사본을 만든 곳'


나는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거의 20년간 한글개역성경이 유일무오한 성경으로 배워왔기 때문이었다. 마침 나는 대학교 3학년 1학기 개강을 맞이 하게 되었다. 나는 신학과의 수업도 신청해서 듣게 되었는데, 마침 '신약총론'이라는 학문비평 수업을 듣게 되었다. 성경을 학문의 잣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과목이다. 앞에서 말한 '알렉산드리아', 소수사본 계열을 옹호하시며 가르치셨다. 오래되고 사본이 적을수록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가르치셨다. 나는 존경하는 목회자님이 틀린 말을 하시진 않으실텐데… 하며 수업을 듣는 3개월정도 고뇌에 가득차게 된다.

그러고 있는데 목회자님께서 '성경의 최후통첩'(성경의 두 뿌리) 라는 소책자를 주셨고, 왜 알렉산드리아 계열 번역이 부족하고, 성경 말씀의 왜곡과 빠짐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하나님께로부터 큰 벌이 임할 것임을 읽고 어떤 것이 바른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 후에 기말고사를 치는데 도무지 '학문비평'의 답을 쓸수 없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진화론에 대한 답을 쓰지 못했듯 역시 그냥 백지로 시험지를 내었다. 그런데 F를 맞았다. 출석도 다했고, 중간 중간 숙제도 다 해서 냈는데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 수업을 통해 바른게 무엇인지 더 깨닫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했었다.

그렇게 2학년때 방황하던 모습과 달리 3학년때부터는 착실히 학교 수업에 임하였다. 레포트들도 목회자님께서 자료들을 주셔서 잘 할 수 있었고, 잘 할 수 있다고 목회자님께서 항상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고 항상 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해 주셨고, 그로 인해 나의 건강은 점점 회복되어 갔다.

항상 나는 불안하다. 의지가 약해 무엇이든 잘 포기해 버린다. 만약에 내가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면 500m도 못가서 못간다고 떼를 써서 내려 올 듯 싶다. 오르지 못할 것 같은 산은 피해버리는 그런 겁쟁이 같은 면모가 다분한 것이다. 일단은 피하고 본다. 일을 미루고, 게으르다. 그렇게 좋아하는 피아노도 만약에 평탄히 대학을 나왔더라면 지금쯤 지겹다고 안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생각해 보니 벌써 20년이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말이다. 하지만 나는 피아노가 좋았기에 그 소리와 함께 한 지난 20년이 행복했다.

내가 기억하는 피아노와의 첫 만남은 3살때이다. 햇살이 좋은 어느 초여름날 문이 열려있고 발이 쳐져 있는 옆집의 피아노의 소리가 좋아서 기어들어 가서 구경했던 것이었다. 내가 처음 피아노를 시작한 곳도 바로 그 옆집 피아노 학원이었다. 그 원장님은 내가 어렸을 때 자신의 학원에 기어들어와서 피아노 소리 듣는 것을 기억하고 계셨었고, 내가 그 학원 다닐 때 나와 내 학원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엄청 이해력이 느린 아이였고, 바이엘도 2년만에 뗐다. 그래서 많이 혼난 기억밖에 안난다. 혼나도 끈기있게 다녔던 이유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데 느려서 많이 혼난다. 내가 어릴 때 걸을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걷지 않았던 것처럼, 무엇을 함에 좋게 말하면 신중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우둔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에베레스트' 산에 올랐던 사람들은 어떻게 참으며 자신의 목표를 완수했는지 보니, 내가 아직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떠한 혹독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걸음들을 굽히지 않고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저 '에베레스트 탐험대원들'을 보니 내 앞에 있는 조그만 인정받지 못함과 당장 연습을 많이 못함이 그렇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 같다. 높은 산 정복을 위해 저렇게 목숨을 바치는데 가장 고귀하고, 우리의 영존하는 생명을 위한 나침반이 되는 성경말씀을 위해 살아가는 것에 더 열정을 쏟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저분들도 그 말씀을 모르는 것이 아니겠지만, 산 보다는 나는 '하나님의 그 말씀'의 광맥을 캐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글개역성경>은 알렉산드리아 계열이고 오류가 많고 오역이 많고 빠진 말씀이 많다. <한글개역개정본>이 나왔지만 역시 완전히 고쳐지지 않은 상태로 나와 있다. <한글개역성경 관주>에 보면 빠진 성경구절에 '어떤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라고 주를 달아 놓았다. <킹제임스성경>이라 말하지 않고 그렇게 적어 놓은 것이다.

바른 길은 좁고 협착하여 가는 사람이 많지 않다. 내가 저 사람들이 왜 굳이 '에베레스트' 같은 춥고 높고 위험한 곳을 왜 가는 것일까?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 시작도 제대로 못한 상태이다. '최적의 번역 킹제임스 한글성경' 편찬과 보급과 그 복음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서 걸음마 단계도 못한 상태인데도, 벌써 숨이 차서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게만 느껴지고 정상이 멀리 보인다.

내가 이 일을 다 마치지 못하고 죽게 되더라도, 다음 사람의 성공을 위해 길을 닦았던 '멀로리' 나 '스위스 원정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나님의 그 말씀'은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못하지만 소수를 통해서 그 명맥을 이어간다. '하나님의 그 말씀'을 읽고 그 길을 가는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입장과 같은 것이다. 그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 다음 소수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먼저 있던 소수의 사람들이 귀히 여겨 잘 전달하였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걸음을 귀히 여기는 사람은 내일의 한걸음도 가치 있는 것이다. 'Steady and study, you win the race!' 라는 영어 속담처럼 말이다.

그래서 토끼와 거북이의 구전 동화가 그렇게 많이 읽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릴 때 보다 오히려 커서 그 동화의 내용이 동감이 되는 이유는 '인생은 짧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인 것을 깨달아서 그런 것 같다. 내가 지금 피아노를 잘 못 치지만 그래도 피아노 치는 것을 잊지 않고 아직 치고 있음은 낙심했을지라도 끝까지 피아노를 쳤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하루에 한번은 꼭 있는 것 같다. 내가 포기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앞에 닥친 상황이나 어려움이 너무 싫기 때문인 것 같다.

추운 강풍과 눈과 죽음의 위협과 자신의 의지를 지켜내며 '에베레스트' 산을 오른 사람들이 그래서 그리도 위대한가 보다!!

자신의 적은 항상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환경이 변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느냐? 아니면 자신을 믿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지금의 삶과 나중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주기 때문이다. 착한 것과 옳은 것을 선택할 줄 아는 결단력은 그래서 다른 것이다. 착하다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편한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그 왕국'으로 가는 길을 잃게 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의 그 말씀의 길'을 가는 좁고 협착한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그 왕국'으로 가는 길을 얻게 될 것이다. 좁고 협착하여 힘들기에 '하나님의 그 말씀'에서 성도들에게 인내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오래 참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 아버지'의 품으로 가는 길은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질투의 세력들이 올무를 놓고 함정을 파서 기다릴 것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삼각관계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그 말씀'인 성경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은 항상 우리가 낙심하여 있을 때 계속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돌같이 딱딱한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 당신의 말씀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샬롬.'

<2008.1.18(금) 새벽에/ '에베레스트의 정복' 번역을 마치고/ Beth-dian 적다>

에베레스트의 최대 난제중 하나는 그러한 광활한 높이에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는 인간의 몸과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다.


인류 최초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산 정복의 뉴스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 전날 밤인 6월 2일에서야 세계로 보도되었다. (1953년 6월 2일자 발행 인도영자신문 'The Tribune India')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이렇게 15분간 세계 최대 정상 위에 우뚝 서려고 그들은 사투를 이겨냈다!! 에드문드 경과 노르가이 씨가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한 후의 날에 하산한 에드문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악수를 나눴고, 앵글로색슨 정식절차를 벗어 버리고, 호흡이 부족할 때는 서로가 등을 두들겨 주었습니다.' (We shook hands and then, casting Anglo-Saxon formalities aside, we thumped each other on the back until forced to stop from lack of breath.) (사진제공/NewYorkTimes/High Adventure)

'St. Mary's Church'에서 뉴질랜드 국장으로 거행된 힐러리 경 장례식. 그가 에베레스트산 정복에 사용했던 'ice pick'(얼음깨는 송곳)이 그의 관위에 놓여 있다. (2008.1.22)



[후기] 필자가 이 글을 마치면서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있었음을 전한다. 에드문드 힐러리 경이 왜 죽음을 무릅쓰고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였는가? 바로 눈 속에 살고 있는 '괴물'인 설인(雪人)을 확인하려 한데 있었다는 것이었다. 일명 '예티'(Yeti)라고 불리우는 이 동물은 '가증스런 설인'(Abominable Snowman)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이 글을 1년전에 마쳤을 때 너무 충격을 받아서 보류하였던 것이다. 힐러리 경이 이 괴물에 관하여 강의를 여러 차례 했다는 것이다.



위 사진은 2007년 9월 25일 런던 경매장에서 3,500파운드(약700만원)에 팔린 사진이다. '예티' 증거로서는 최고의 가치이다. 이 신비스런 발자국은 1951년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러 간 산악인들의 한 팀이 네팔-티벳 국경에서 찍은 것이다. 이 괴물 이야기는 1925년 산악인들이 사람보다 2배나 되는 '예티'를 목격한데서 시작된다.  <Updated/20090124>


<Created/20080112> <Modified/20080121> <Updated/20090124> <2009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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