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뎀보의 세월따라 노래따라] [번안가요와 원곡 시리즈 1]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삽과 괭이를 들고 새마을운동을 전개하고 반공을 국가이념으로 삼고 정해진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제재를 당했던...그래서 예술을 위한 예술적 가치보다는 국가의 통치이념에 따라 노래하고 연기해야 했던 시대. 어쩌면, 그렇게 암울했던 시대였기에 그들이 불렀던 노래가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더니 어느새 '한류'로 대변되는 철저한 상업주의 문화 속에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져가는 옛시대 그 노래들...여기 다시 회복시켜 준 조그만 콘서트가 있었다. 40여년전 20대 젊은이들이...지금은 환갑들을 넘기고서도...왕성하게 음악활동을 하는 그 저력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2011.2.7/밤)

[60년대말부터 70년대의 통키타의 포크송은 무엇을 전해주었는가?? ㅡ 기존의 트로트, 발라드계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공유의 개념을 실천 ㅡ 작곡/작사/노래를 서로 공유하면서, 블루진, 통키타, 생맥주와 함께 하는 새로운 청년문화를 개척하다!!]

◆당시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김병익'이 증언하는 포크음악이 청년문화의 산실의 역할이었음을 보도한 기사이다. '자신들의 행동이 퇴폐적이라 함은 획일주의에서 비롯된 색안경 탓'이라고 털어 놓는...위로 부터 가수 이장희, 양희은, 김민기. (동아일보/ 1974.3.29 발행).


1960-70년대 젊은이들이 열광했던 청년들의 문화 아지트, 음악감상실 '쎄시봉'을 기억하시는가? '쎄시봉'이란 불어 ㅡ 'C'est si bon' ㅡ로서, '그것은 멋지다' 의미를 지닌다...음악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차 한잔 마시며 다양한 음악을 함께 감상할 수 있었던 곳...그 시절, 국내 유일의 팝음악을 즐길 수 있던 곳...진심으로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 존재했던 곳...수많은 포크 뮤지션들의 발판이 되었던 곳...이 시대 중년들이 청춘의 고민과 방황, 열정을 음악으로 나누며 젊음을 소통하던 곳...이곳이 '세시봉'의 산실이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부류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그 젊은이들의 중심에는 통기타를 치며 샹송이나 칸소네 또는 팝송을 부르는 아마츄어 가수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포크가수'(Folk Singer)라고 불렀다.

그 시절 그 포크가수들이 우리 곁에 다시 찾아 왔다. 지난 설특집 '세시봉콘서트'(MBC)를 통해서 시청하신 분들은 네 명의 '세시봉' 출신 가수들(조영남/송창식/윤형주/김세환)이 불렀던 노래들이 상당수 외국곡이었음을 자막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것 같다.


잠시, 여기서 본 이야기를 읊기 전에 '세시봉' 이야기를 하고 넘어간다.

1967년 어느 날, 서울 명동의 음악카페(음악다방/음악클럽) '쎄시봉'에 색다른 젊은이 3명이 통기타를 메고 나타났다. 송창식, 윤형주, 이익균이 CBS 라디오 명랑백일장(MC 이상벽)에 첫 출연 후 방송활동을 시작하면서 포크라는 장르를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트리오 쎄시봉' 활동은 이익균의 군복무로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1968년 2월, 송창식과 윤형주 두 젊은이가 '트윈 폴리오'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기타 두 개뿐인, 지극히 단촐한 연주를 펼치는 그들은 경쾌한 비트, 발랄한 음색으로 그때까지 한국가요를 지배했던 영탄적 분위기를 걷어내고 젊은 청중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듀오 '트윈 폴리오'는 그 여세를 몰아서 1년 뒤 1969년 첫 독집음반을 냈고, 번안곡 '하얀 손수건'을 히트시켰다. 그러나 1969년 12월 22, 23일 드라마센터에서 고별공연을 끝으로 짧은 20개월의 '트윈 폴리오'를 해체하고, 송창식, 윤형주 각각의 솔로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필자는 이 때 군복무중이었다. 낮의 훈련(비상 전투대대)을 마치고 저녁식사 후, 잠시 휴식 중이었다. 내무반 안에는 흘러나오는 가요가 있었다. '트윈 폴리오'의 '하얀 손수건'과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잔' '님아' 등은 자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귀에 익은 가요들이었다.

그 후 몇 년은 포크의 황금기이자 춘추전국시대였다. 젊은 가수들은 한결같이 통기타를 다뤘다. 여가수로는 양희은, 박인희, 이연실이 삼두마차를 이루었고, 라나에로스포, 쉐그린, 은희, 김정호, 어니언스, 4월과 5월이 인기를 얻었다. 스스로 작곡하고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 시대도 이때 열렸다.
'은희'의 '꽃반지'는 필자가 제대 후, 복학하고 나서, 데이트 중에 사연이 많은 노래였다.

그 중 재치와 유머, 그리고 깔끔한 모던 포크를 선보인 김세환은 경희대 재학중에, 윤형주의 권유로 방송생활을 시작하였고, 양희은은 1968년 당시 미문화원의 학생 영어클럽 오크의 창립기념 행사에 초청된 트윈폴리오에게 기타반주를 무턱대고 부탁한 후, 그녀의 가창력을 선보인 것이 인연이 되어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필자는 이 당시 미문화원에서 모이는 영어클럽활동 'Pine Tree Club'에 참석하고 있었다. 클럽회장은 서울대 재학중이었던 남학생이었다. 이 모임에서는 진행 중에는 영어로만 말하는 모임이었다.

그런데 1972년 '10월 유신'으로 상징되는 암울한 정치상황은 포크계의 자유로운 정신을 압박했다. '아침이슬'이 금지곡으로 낙인찍힌 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무려 440곡이나 금지곡이 되었다는 통계에 다시 한번 놀라울 뿐이다!!

◆'7080세대'를 이해하려면, 통기타음악을 펼쳐봐야 한다. (경향신문/1999.11.12)

그 당시 방송진행이나 DJ를 맡고 있던 방송인들(피세영/이종환/최동욱)은 한국 대중문화의 한 이정표를 세운 개척자들이었다고 본다. 피세영(TBC 방송 진행) 씨는 영어영문 학자 피천득의 아들이요, 미국으로 이민가셨고, 이종환(MBC) 씨는 너무 잘알려지셨고, 그리고 최동욱(DBS 방송 진행) 씨는 지금도 교통방송 TBN에서 활동중이다. <자세히보기>.

    ●무교동의 추억, 쎄시봉 음악감상실을 기억하십니까? <자세히보기>.

    ●본전다방 ㅡ 심지다방(오비스캐빈 원조) 청자다방
    을 기억하십니까? <자세히보기>

    ◆1960년대말부터 시작된 통기타문화는 무교동의 '세시봉' 명동의 심지(오비스캐빈)와 청자 다방 등에서 싹트고 있었다. 1974년 재학 중에 필자는 'CO'와 청자다방에서 통기타 라이브를 들어가면서 데이트를 즐겼다...

    <왼쪽사진> 1972년에 가수 은희(본명/김은희)가 부른 '꽃반지 끼고'는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제주도 토박이. 고2때 상경, 서울예고를 졸업. '기타' 외에 국민학교때부터 시작한 '피아노' 실력도 대단하다고 전한다. 은희는 1971년에 혼성듀엣 '라나 에 로스포'(개구리와 두꺼비)의 한민(본명/박윤기)과 활동하였다. '사랑해'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이 곡은 번역곡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실제로는 중앙대생 '오경윤'의 곡이라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그 외에 6명의 여성 가수들이 거쳐간 이 팀은 해체되었고, <오른쪽 사진> 은희 후 최안순이 가세함. 최안순 씨는 그후 솔로로 독립해서 '산까치'를 불러 인기에 올랐고, 지금은 '예능교회' 목회자의 사모로서 복음사역에 전념하고 있단다. 한민 씨는 1980년에 트로트 가수로 변신 '어차피 떠나간 사람'을 내놓았다. 이 노래는 괜찮은 반응을 보였다고 전한다. 아무튼 포크송 가수가 트로트 가수로 변신한 것도 드문 일이다. 그는 2006년 투병 중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을 제공해주신 '명하' 님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ㅡ 화중광야).


특히 한국 가요의 산증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백천(별명/똘강='작은 개울'을 뜻하는 충청도 말)이 기획한 '세시봉 프로그램'은 그 당시 라디오방송 음악프로그램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복사판이었다. 20원짜리 입장권을 사가지고 들어가면, 음료수와 음악을 물리도록 들을 수 있었던, 저비용 고효율을 통해 신세대들은 싼비용에 질좋은 문화향수의 기회를 접하게 되었으니...필자 역시 복학 후 서너 번 가본 기억이 있다.

 

◆<왼쪽> 한국 포크음악의 터를 닦은 이백천 씨가 당대의 숨은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포크음악의 재발견/EBS 영상캡쳐/2005.6.4 방영). <오른쪽> 1980년대 젊은 음악인들과 함께한 이백천(앞줄 맨 오른쪽)씨. 맨 뒷줄 가운데가 '들국화' 멤버였던 고 허성욱, 앞줄 왼쪽부터 가수 강인원, 전인권, 그리고 이백천. <자세히보기>.


이백천(李白川) 씨인가 아닌가 처음에는 아리송했었는데, 막상 인터넷에 검색해서 사진을 보니, '아, 이 분!!'. 그렇다. 예전에 라디오/TV '노래자랑' 프로에서 심사위원을 하던 '입담이 좋은'(?) 바로 그분이었다. 작곡자 황문평 선생과 함께 자주 나오셨던 바로 그 분이었다. 여담이지만, 황문평 선생은 필자가 어렸을 때 보았던 우리 영화 음악의 주도적 역할을 하신 분이라 생각된다. 지금도 그분이 만든 영화 '군도'(群盜)의 주제가는 지금도 그 운율이 읊어지곤 한다: '가자~ 가자~ 우리의 보금자리 속리산 기슭으로 군도야 가자! 가자!' 필자가 생각해도 대단한 기억력이다 ^-^;;

신라시대 정의를 위하여 가진 자들의 물건을 취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산적들'의 생활을 그린 영화였다. 당시 일류급 배우들, 김승호(배우 김희라 부친), 최무룡(탈렌트 최민수 부친), 최은희, 문정숙...김희갑과 구봉서 ㅡ 두 분이 계곡물에서 목욕하는 아낙네(전계현?)를 보고서는 내기하지고 해놓고, 큰 바위 위에서 허리띠를 서로 입에 물고 당겨서 끌려오는 자가 지는 걸로...약삭빠른 김희갑이 온힘을 다해 당기다가 그만 그 허리띠를 입에서 놓으니까...구봉서가 뒤로 나가 떨어져 물 속으로 첨벙하였겄다...이에 소스라치게 놀란 아낙네가 기겁해서 피해버리는 장면은...지금 이 글을 쓰면서 떠오르기에 옮겨 본 것이다...그리고 스님역을 단골로 맡았던 잘 싸우는 이업동 씨...이 영화에서 산적들이 말을 타고 산길 아래로 내려오는 장면에서, 바로 황문평 선생이 작곡한 주제가가 흘러 나온 것이다. 필자가 기억하기로는 '동보영화사'(1961) 작품으로, 감독은 유심평(柳心平) 씨였는데, 인터넷 검색해보니 재일동포였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국영화 시대극의 금자탑을 이룬 영화 '군도' <화중광야 제공>


실제로 스님역을 자주 맡다가 실제로 스님이 되신 분도 계시다. 정민(鄭珉) 씨. 필자가 그분을 뵌 것은 1981년이었고, 그 당시 불교로 귀의(歸依)하시어 '재가 법사'(在家法師/결혼후 귀의하여 법문을 포교)로 봉직하시고 계셨는데...지금은 어찌 지내시는지 잘 모른다. 그분이 출연했던 영화 '그들이 가는 길'이다. 1947년 '태양영화사'가 10여만원의 제작비를 들여 만들었다. 임운학(林雲鶴)이 감독과 배우를 맡고, 이집길(李集吉), 채숙희(蔡淑姬) 등이 함께 출연하였다. 16mm 무성영화로, 1947년 9월 20일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단다.

['그들이 가는 길' 시놉시스 ㅡ 정성을 다해 기른 양아들에게 배신당하고 자살을 기도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친한 친구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정민은 그 친구의 자식을 양자로 기른다. 오히려 친자식은 유모에게 맡기어 멀리 떠나 살게 한다. 양자의 출세를 위하여 정민은 가산을 탕진하기까지 했지만 장원급제하여 평양감사가 된 양자는 찾아간 정민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푸대접한다. 비관한 정민이 대동강에 투신자살하려는 것을 때마침 감사의 폭정에 못견디어 자신들도 자살하려던 숙희일가에 의해 구출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암행어사. 그는 바로 정민의 친 자식인 운학이었다. 어사 운학은 배은망덕한 평양감사를 응징하고 숙희일가를 구해준다는 내용의 권선징악의 이조 야사이다. <자세히보기>.

필자가 어렸을 때 주류를 이루었던 한국영화의 테마는 바로 '권선징악'이었다. 초반부터 중반에 이르기까지 '악'이 주도하다가(그 사이 관중들은 여기 저기서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시치느라...) 후반에 이르러서는 '선'이 주도하면서, 관중들로부터 공감대의 '박수'와 '통쾌함의 '눈물'을 받아내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 것이 대부분의 영화 테마 주제였다.

그런데 위 무성영화 '그들이 가는 길'의 감독 겸 배우 임운학 외에 인기배우였던 강홍식을 빼놓을 수 없겠다. 영화평론가 이근태 씨는 강홍식의 개인적인 역사를 알아내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강홍식은 평양 거부의 아들로 알려진 분방한 성품의 인물로 전해지고 있는데 처음 결혼한 전옥 가족이 일체언급을 회피하여 지금까지의 상세한 행적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있다. <자세히보기>.

그런데 최근에 강홍식의 비극을 밝혀준 기사가 보도되었다. <자세히보기>.  한국 연예사에서 최초로 탄생한 부부연예인이 있다. 1926년 '장한몽'(長恨夢/이경손이 연출한 통속 연애극. 1920년 이기세 감독의 '장한몽'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이수일과 심순애, 김중배의 삼각관계 속에서 결국 수일과 순애가 새출발한다는 내용) 영화에 출연한 강홍식과 눈물의 여왕이며 비극의 주인공인 '전옥'이 첫 테잎을 끊었다. 1920년대말 극단무대에서 만나게 된 강홍식과 전옥은 1932년 첫 딸 강효실(1952년 최무룡과 결혼, 탈렌트 최민수의 모친)을 낳으면서부터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면서 강홍식은 레코드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봄은 왔네 봄이와 숫처녀의 가슴에도/ 나물캐러 간다고 아장아장 들로 가네/ 산들 산들 부는 바람 아리랑타령이 절로 난다. 흥-

'처녀 총각' 이 노래가 1934년 초봄의 바람과 더불어 전국으로 번지기 시작하여, 1934년에 대힛트하였단다. 필자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무척이나 즐겨 불렀던 노래였는데...부친께서도 휘파람을 불러가면서 좋아하시던 노래였는데...이 노래가 최민수의 외조부가 부르셨다는 사실도 이 글을 정리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인간적으로 최민수가 얼마나 고독과 고난 속에서 지내왔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그에게는 누이가 셋이나 있다는 것도 이번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지척 앞에 혈육을 두고서도 만나보지 못한다는 것은 '한민족'(桓民族) 역사의 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고 판단된다!! 필자 역시 그러한 민족적 비극의 한 일원이기 때문이라...어디 필자 뿐이랴...우리 '한민족'((桓民族) 모두의 비극인데...이산가족을 가로막고 있는 저 '휴전선담'이 반드시 허물어질 그 날이 어서 빨리 와야 할턴데...


다시, 이야기는 '똘강' 이백천 씨의 증언이다. 그가 젊은 후배 가수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단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왜 노래를 하고, 왜 가수 노래를 듣는지 근본 문제를 다시 생각할 때'라며, '요즘 유명한 젊은 가수들 목소리만 듣고 누구 노래라고 지목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예전에는 노래에 색깔이 있었어요. 현인과 고복수의 노래에서는 혼의 빛깔이 들렸지요. 지금은 혼의 빛깔을 듣게 해주는 가수는 드문 것 같아요. 사람들도 그런 것 들으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게 만들어놨는지도 모르죠. 지금은 그런 소리를 듣고 싶으면 성당, 절에 가야 할 지경이 됐어요. 최근 선거의 정치인 연설에서도 관객의 영혼에 호소하는 말들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정치인들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는 말에 혼의 빛깔이 없어졌어요.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의 말투도 마찬가지지요. 대중음악에서 그걸 찾는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상황이 돼버린 것 같아요.'

[질문] 포크송 세대에 있었던 '혼의 빛깔'이 왜 지금은 사라졌을까요? 열정이 식어서일까요?

'가공된 음향, 기계음의 증폭된 음향들, 그런 것들을 음악이라고 듣기 시작하면서 섬세한 소리를 듣는 능력이 쇠퇴해 버렸어요. 소리를 여음까지 다 듣는 욕심들을 가질 짬이 없어졌다고 할까요. 50년 전 음악과 비교한다면 요즘 사람들은 바빠서 그런지 좀 이상해졌어요. 제가 석양음악회를 만든 것은 음악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어요. 새로운 청중, 관중을 만들자는 것이었어요. 현장으로 애써 찾아온 사람들이 하품하면서 그날 공연을 망칠 수 없지요. 음악이 잘못되면 관객은 '야지'를 놓고 고함을 치고 좋으면 박수를 쳐야죠. 그래야 '기적의 공연'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음악회는 관객과 같이 만드는 현장인데 지금은 관객의 역할이 쇠퇴해버린 것 같습니다.'

이백천 씨는 노래의 세 가지 구비 조건을 자신의 블로그에다 제시하였다:

<마음>...노래를 하자는 마음...

<몸>...그 마음을 그대로 몸이 받들어 소리를 냅니다...(소리를 내는것은 몸...마음만으론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마음 못지않게 몸도 노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긴장을 풀고...날아갈듯 즐겁고 자유스러운 마음을 간직한 몸...) (마음과 몸이 똑같이 균등하게 노래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제3의 조건...

<설레임>...노래는 설레임이어라...심성을 씻어내는 설레임이어라. (마음의 바닥에서 움터오르고 배꼽 밑 한치..단전에서 솟아오르는 삶의 설레임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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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옛날의 추억을 더듬으면서 써내려 가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다. 일단, '세시봉 스토리'는 여기서 줄인다.


필자 역시 이번 '세시봉콘서트' 시청을 통해서 몰랐던 외국곡이 있었음을 알게 된 경우도 있었다. 다음은 이번 '세시봉콘서트'에서 불려진 외국 원곡들과 번안곡들 만을 모아 본 것이다:

The Everly Brothers

Let It Be Me(1960)

내 곁에 있어주오

원곡

Beach Boys

Cotton Fields(1969)

목화밭 원곡

Connie Francis

The Wedding Cake(1969)

웨딩 케이크

번안곡

Nana Mouskouri

Me T'Aspro Mou Mantili'

하얀 손수건 번안곡

Tom Jones

Green, Green Grass of Home(1965)

고향의 푸른 잔디

번안곡

Bobby Darin

Lost Love(1962)

잃어버린 사랑

원곡

The Drifters

Save the Last Dance for Me(1960)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원곡

Louis Armstrong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성자의 행진

원곡

Traditional African-American Tune

Do Lord, Remember Me

주님, 나를 기억하소서 복음성가

Bobby Bare

Detroit City(1963)

디트로이트 시티

원곡

Bobby Edwards

You're the Reason(1961)

당신 때문에

원곡

Don Gibson

Sea of Heartbreak(1961)

상심의 바다

원곡

Cliff Richard

The Young Ones(1961)

젊은이들

원곡

Lou Reed

Good Night Ladies

잘 자요, 아가씨들

원곡

Gene Vincent & Blue Caps

Be-Bop-A-Lula(1956)

비법파룰라 원곡

Ray Charles

What'd I say?(1959)

뭐라고 말할까?

원곡

Sam The Sham&The Pharaohs - Domingo Samudio

Wooly Bully(1965)

울리 불리 원곡

Chubby Checker

Let's Twist Again(1961)

다시 트위스트를 춰요

원곡

The Seekers

Isa Lei(1965)

우리들의 이야기

번안곡

따라서 일반인들은 음악을 쉽게 들어 볼 수도 없었고, 게다가 외국음악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을 때, 방송국을 통해 외국 음반들을 비교적 접하기 쉬웠던 포크계열의 가수들은 외국 노래 중 우리네 감성과 잘 맞는 노래들을 골라내어 우리말로 번안하여 불렀다. 의외로 그 당시 불렸던 번안곡들을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소개하려 한다. 우선 우리말 <ㄱ>으로 시작되는 제목부터 먼저 소개한다:

번안곡(가)

가수

번안원곡

가수

검은 상처의 부르스 김치캣 Broken Promises Sil Austin
검은 장미 바니걸즈 La Rosa Nera

Gigliola Cinquetti

고별 홍민

Stringiti Alla Mia Mano (나의 손을 부여잡고)

Miranda Martino

고아 윤연선/오세은 L'orphelin Claude jerome
고향의 푸른잔디 조영남 Green Green Grass Of Home Tom Jones
꽃피는 마을 윤연선 Fields Of St. Etienne Mary Hopkin
9월이 오면 유주용 Come September Billi Vaughn
귀여운 베이비 김계자 Pretty Little Baby Connie Francis
꿈속의 고향 임용재 One Way Ticket Neil Sedaka/Eruption
굿바이 최영희 Goodbye Mary Hopkin
그대는 나의 운명 임용재 You Are My Destiny Paul Anka
그대 떠난 이 밤에 옥슨 80 Living Next Door to Alice Smokie
그대여 안녕 이숙 Ciao, Cara, Come Stai (차오 내 사랑) Iva Zanicchi
그리워라 현경과 영애 Adios Amor Mocedades
그리운 그대 모습 정유경 Visions Cliff Richard
그 사람 목석 박지영 Hot Stuff Donna Summer
그 얼굴 Two Ace All I Have To Be Is Dream The Everly Brothers
기다리는 마음 이성애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Sammi Smith
기타야 조용히 울려라 김욱/하남궁 Chitarra Souna Piu Piano Nicola Di Bari


위 곡들 이외도 <ㄱ>으로 시작되는 곡목들이 추가될 수 있다. 이 중에서 필자가 학창 시절에 자주 불렀던 '김치캣'이 부른 '검은 상처의 부루스'를 소개한다:

    그대 나를 버리고 어느 님의 품에 갔나/ 가슴에 상처 잊을 길 없네/ 사라진 아름다운 사랑의 그림자/ 정열의 장미빛 사랑도 검은 상처의 아픔도/ 내 맘속 깊이 슬픔 남겨 논/ 그대여 이 밤도 나는 목메어 우네

    사라진 아름다운 사랑의 그림자/ 정열의 장미 빛 사랑도 검은 상처의 아픔도/ 내 맘속 깊이 슬픔 남겨논/ 그대여 이 밤도 나는 목메어 우네/ 그대여 이 밤도 나는 목메어 우네


구름이 흘러가듯 세월은 가고 잊혀진 뒷동산에 추억은 묻혀 버렸지만,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도 같이 낭만이 번져있는 그리운 노래: '그대 나를 버리고 어느 님의 품으로 갔나. 가슴에 상처 잊을 길 없네.' 이색적인 목소리로 '검은 상처의 블루스'를 불러줬던 '김치캣'이 있다. '김치캣'은 '검은 상처의 블루스' 뿐만 아니라 '정열의 마카레나', '비내리는 호남선', '아리랑 목동' 같은 노래를 불러서 50여년 전 우리네 가요 팬들을 열광시켰다. 이 밖에도 '워싱톤 광장'(번안곡)을 부른 '이시스터즈'가 있다. 이 번안곡은 공전의 히트곡이었다. 그리고 필자가 무척 즐겨불렀던 '정시스터즈'의 '슬픈영화'(Sue Thompson이 부른 'Sad Movie' 번안곡)가 있었다그 다음에 '김시스터즈'가 있었다. '김시스터즈'는 '목포의 눈물'(필자의 모친이 즐겨부르시던 노래)을 부른 이난영(李蘭影) 씨의 따님들이었다. <자세히보기>. 남편 김해송(金海松/작곡가 겸 가수) 씨가 625동란 때 북한으로 가는 바람(월북인지 납북인지 확실치 않음)에, 이난영 씨는 무척이나 고생하셨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자세히보기>. 여기서도 '한민족'(桓民族)의 디아스포라(이산가족)의 또 하나의 비극의 당사자들이다.

 

R&B - SOUL의 새로운 분위기 외국 원곡 'Broken Promises'를 번안, '검은 상처의 부루스'로 공식 데뷔한 '김치캣'(왼쪽 이미지) <듣기>. 1963년 동아방송(DBS) '베스트 텐'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동아일보/1963.12.21 발행). 한때 거리에서 술집에서 너무나도 유행해서 최무룡, 최은희 주연의 동명 영화에서 '김치캣'이 등장해서 주제가를 부르는 장면이 포스터 속에 보인다. 필자는 이 영화를 본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 포스터는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1961년에 영화의 주제가로 삽입되었다 ㅡ  '黒い傷あとのブルース'(검은 상처의부루스) <동영상보기>

◆해외 진출을 앞두고 발표했던 '김치캣'의 1962년 독집음반 '검은 상처의 부루스'는 한국 대중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음반이다. 총 12곡이 수록된 이 앨범의 가치는 '국내 최초의 12인치 LP'라는 사실로 더욱 빛난다. 12인치 LP는 대중이 널리 인식하고 있는 LP의 사이즈가 적격이다. 1면에 수록된 6곡은 타이틀인 '검은 상처의 부루스'(원곡/ Broken Promises)은 물론 전곡이 번안곡이고, 2면은 박춘석의 창작곡 '눈물의 자장가'등 4곡과 번안곡 2곡으로 포진되어 있다.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스탠더드 팝계열의 노래들로 큰 사랑을 받았던 이 앨범은 대중적 히트 여부와는 상관없이 '국내 12인치 LP의 효시'라는 점에서 명반으로서의 가치와 역사성은 확고하다. (본 음반자켓 이미지를 제공해주신 '명하' 님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ㅡ 화중광야)

1948년 미국 '컬럼비아 레코드사'에 의해 세계 최초로 LP판이 개발된 이래 국내에서는 8년 후인 1956년에야 LP시대가 열었다. 당시 가수를 출연시키지 않고도 방송을 손쉽게 할 수 있도록 KBS에서 직접 10인치 LP를 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국내 최초의 12인치 LP는 어떤 가수의 음반이었을까? 주인공은 여성듀엣 '김치캣'(Kimchi Kats/김치켓/김치캐츠)이다.

외국의 팝송 'Broken Promises''검은 상처의 부루스'로 작곡자 박춘석의 편곡으로 불러서 12인치 독집 LP '김치캣 히트집'을 발표하며 공식 데뷔했다.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됐던 '김치캣'(Kimchi Cats)은 박영수와 김영기 두 아가씨가 콤비가 된 듀엣의 이름이다. 리더인 박영수는 부산 사범학교 출신으로 부산 수안동에서 태어났으며, 6남매 중 다섯째인 순 경상도 아가씨였다. 그리고 박영수와 명콤비가 된 김영기는 서울 서대문구 교남동에서 태어난 서울 아가씨로 이화여대를 중퇴한 7남매 중의 막내둥이었다. 노래가 좋아서 단짝이 되고, 단짝이 된 두 아가씨는 '김치캣'이라는 하나의 이름을 갖기로 했단다. 노래가 인연이 되고 노래 때문에 맺어진 '김치캣'은 수줍은 아가씨들이었지만, 오직 노래를 부르고 노래와 더불어 살기 위해서 무대에 나서기로 결심을 했으며, 처음 나선 곳이 '미8군쇼'였다. '테네시 왈츠'라는 팝송이 그들의 데뷰곡이었단다. '테네시 왈츠'로 인정을 받게 된 '김치캣'은 얼마 후 '검은 상처의 블루스', '아리랑 목동', '아무도 없더라', '비 내리는 호남선' 같은 히트곡을 계속 날려 인기를 얻어갔다.

그리고 1970년에 발매한 '김치캣의 히트 하이라이트' 앨범 또한 국내 최초로 25인조 오케스트라가 세션에 참여한 기념비적인 음반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필자는 아직 이 음반을 만나보지 못했다. 허기야 이 때에 필자는 '월남전'에 참전 중이었으니까...

다음은 '김치캣'의 번안곡 '검은 상처의 부르스'의 원곡 'Broken Promises'를 소개한다. 우선 '실 오스틴'(Sil Austin)의 색소폰 연주곡을 들어 본다:

◆국내에서 발매된 LP판 커버와 'vitzza'(러시아)가 무료 제공한 '실 오스틴'(Sil Austin)의 연주곡이다. <원곡 가사작업중...>


[부록] 그리고 참고로 그 시대 '씨스터즈와 부라더즈'의 음반 상황을 소개한다: [1960년대 한국 음반 전시회 (3): 씨스터즈와 부라더즈] <자세히보기>.

◆1963년 한 해는 가요계에 보컬과 듀엣(시스더즈/보이즈) 등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등장했다는 기사 (경향신문/ 1963.12.28)

이제 필자의 스토리를 전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울과 지방에서의 음악 경험의 차이는 엄청났다. 예전(1960년대 전반)에는 필자가 살던 지방에는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라디오 공중파 수신력이 약해서 전파가 빈약하기 그지 없었다.

외국 원곡들은 지방에 소개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라디오 마저 없는 집들이 많았고, 음반(10인치SP/12인치LP)을 들을 수 있는 전축 역시 고가라서, 왠만한 집이 아니면 감히 이런 기구들을 들여 놓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전축에는 '정류관' '전압증폭관' '출력관' 등의 '다마'(전구)가 들어 있다. 이는 가정용 전축(천일사 제품이 인기?)이었다. 아니면 동네 전파사에서 주문 제작하는 조립형전축도 인기가 많았다.

필자에게는 많은 방해물이 산적해 있었다. 우선, 엄격했던 유교 가문을 해친다는 조건 때문에, 부모님과 형님들은 필자의 '딴따라' 되는 길을 적극 막으셨다. 그래서 전축을 구해주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필지는 타학교 선배뻘 되는 진경환(당시 농고 재학중) 한테 포터블 전축꾸미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위장 전술로서 동생(정재현)과 전략을 세웠다. 일본제 빅터사 제품인 턴테이블을 싼값에 사서, 앰프를 꾸몄다. 전축에는 전구가 생명이다. 전구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351A ㅡ 방열전파 정류관' '350B ㅡ 출력용 방열 빔4극관'이 있었다. 학생이 무슨 돈이 있었겠나?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막상 음반을 올려놓고 시동해보니, 속도가 느린 것이다. 모터 중심 심을 고무바킹이 맞물려 돌아가는 식이었는데, 너무 오래 사용한 것이라서, 그만 고무바킹이 많이 닳아버린 것인다. 새것으로 교체도 불가능하였다. 자연히 속도가 맞을 리 없었다. 1분에 33바퀴를 돌아야 제 속도가 되는 것인데...이 고충은 별도 <영어회화 독학이야기>에서 상세하게 밝히게 될 것이다.

◆그 당시 이 제품만 가지고 있어도,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함께 춤추자고 하면서...참으로 낭만을 즐길 줄 알았던 그들..지금은 다 어디로 흩어져 버렸는가...필자의 옛 기억을 더듬으면서 음반도 입수하였고(비록 동일한 자켓은 아니지만, 트위스트곡들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것인데...아무래도 '백판'이라서인지...음질이 너무 떨어진다. 이 전축(일제 내셔널)은 당시 필자가 소지하였던 그 모델과 동일 한 것을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찾아 낸 것이다. (화중광야 제공)


필자는 1969년 6월 입대 1개월 전에 고향에 내려와서, 'NATIONAL'(내셔널) 일본제품 야외용 전축을 구하였고,
당시 유행하던 나팔바지에다 7부 소매 와이셔츠를 입고는 친구들과 'Sam The Sham - Wooly Bully', 'Chubby Checker - Let's Twist Again', 'Gene Vincent - Be-Bop-A-Lula' 'Guitar Man' 등을 틀어놓고 신나게 놀았던 기억들이 있다. 어찌보면, 이번에 방송된 '세시봉콘서트'를 통해서 필자 역시 '타임머신'을 타고 그 당시 젊음의 시절로 돌아온 것 같은 노스탈자에 몰입하게 되었다. 이래서 기록이란 것이 중요한 것임을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비록 지방이었지만, 저 '세시봉스타들'보다 필자는 먼저 팝송을 대하였다. 기타도 중학교 때부터 배웠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팝가수'(딴따라)가 되려고 말이다. 집도 출가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다. 1962년부터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모두가 좌절되고 말았다.

    '지금 이렇게 좋은 세상이 올 줄 알았으면, 차라리 딴따라 쪽으로 보냈으면, 이 고생은 안하겠잖아...'

15년전 어머님의 이 회상의 말씀은 당신 스스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이 아들에게 남겨주신 자책(?)의 여운이셨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차후에 기회가 주어지면 필자의 글 '미완(未完)의 딴따라' 제2부에서 다시 잇기로 한다.

<Created/20110206> <Updated/201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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