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중광야대특집][대한민족 3대 암살미해결 사건] <명성태황후 암살단> 주모자[2]ㅡ미야모토 타케타로(宮本竹太郞)

잃어버린 얼굴 <명성태황후>는 어디에 계신가요??

글/ 정재선 목회자

[예호바가 카인을 향하여 물으시되, '너의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셨도다. (창세기 4:9, 엘로힘말씀] '물귀신이 있어서 거기서 계속 사람 죽고, 사고 난 데 꼭 사고난다 잖아요. 바보 온달 장군이 전장에서 전사하여 관을 옮기려는데 도무지 옮겨지지 않았는데, 평강공주가 와서 위로해주니 움직였대요. 이 땅에 억울하게 죽어간 <아벨들의 피>가 또 무고한 <아벨들의 피>를 부르기에 그 억울하게 돌아가신 <명성태황후>에 대해 목회자님이 글을 쓰시는것 같아요. 그런데 그 억울함을 풀어주실 분은 <예슈아님> 한분 뿐이시죠. 그때까지 잠잠할 수 밖에요...심판은 오직 예호바님만이 하시기에 말예요.' <2013.9.2/오후/디안>

[이미지/화중광야제작 제공]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가 주무시던 <교태전>(交泰殿)의 방의 구도는 하단 왼쪽 도표에서 보듯이, <구궁도>(九宮圖)로 이루어져 있다. 낙서의 9개수(구궁의 수)가 를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전체를 형성하고 있어, 새로운 건국이념과 정치철학으로 출발한 조선의 개국공신들은 왕의 침전 건물을 축성함에 도처에 의 수를 적용함으로써 천지자연(天地自然)의 법도(法道)를 지상에 구현함과 동시에 왕을 만상의 중심자리에 올려놓았던 것이라고 한다.

한편, <하단 이미지 ⑤> 안에서 잠자다가 왜놈의 육군 소위 <미야모토 타케타로> 한테 대청마루로 끌려나가신 <명성태황후의 침소>이다. 이 사진들은 왜놈들이 1900년에 '건청궁'을 강제로 헐어버리기 직전의 귀한 사진들이다. <명성태황후 암살>과 <김구>의 행적 [2] <자세히보기>.

그리고 상단 건물이 바로 <교태전>(交泰殿)이다. <교태전>은 1395년(태조 4년)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에는 없었다가, 1443년(세종25년)에 신축된 건물이다. 이후 1553년(명종 8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고, 다시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1865년(고종 2년)에 중건되었다. 1873년 12월 경복궁 자경전(慈慶殿)의 부속건물인 순희당에서 화제가 일어나 교태전도 함께 소실되었다가, 1875년에 중건되었다.

위 건물이 그때 중건된 모습이다. 현존 건물은 1995년에 복원된 것이라고 전한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주역의 <지천태>(地天泰) 괘의 <대상전>(大象傳)에 나오는 '天地交泰 后以財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 以左右民 '(하늘과 땅이 사귀는 태의 괘상이다. 왕후는 그것으로 천지의 도를 이룩하고 천지의 마땅함을 보필하여 백성을 좌우한다')라는 내용의 <交>와 <泰>를 인용한 것이라고 전한다.

<교태전>은 왕비의 정침임과 동시에 왕과 왕비가 함께 운우지정을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태괘는 상괘가 곤괘, 하괘가 건괘로 되어 있는데, 곤은 땅이자 왕비에 비유되고, 건은 하늘이자 왕에 비유된다. 하늘과 땅이 서로 교합하는 상이 태괘인 것이다. 이 괘의 상과 같이 왕은 왕비와의 교합을 통하여 세자를 생산하게 된다. 왕과 왕비가 교태할 때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막힘없이 잘 통해야 훌륭한 왕세자가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음양교합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으면 제거되어야 마땅하다. 선인들은 지붕위에 용마루가 있으면 하늘의 기운과 땅의 정기가 합쳐지는데 방해가 된다고 믿었다. <교태전>은 물론 궁궐의 침전 위에 용마루가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라고 한다. 그만큼 건강하고 총명한 왕세자를 생산하는 것이 나라의 번영과 왕권 창달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허균, '사료와 함께 새로 보는 경복궁', 서울:한림미디어, 2005, p.100-102, 209-210> (화중광야 소장).

이토록 왜놈들의 만행은 악랄하였고 잔인하였으니...오늘날까지도 그 과오를 뉘우침이 없으니...이제는 도저히 구제불능이다.

<하단 오른쪽 이미지>
서필은 <명성태황후 암살주범> 곧 왜놈 하급 육군소위 <미야모토 타케타로>(宮本竹太郞)가 1894년 동학혁명의 주도자들인 순진한 농민들을 '살해' 하였음을 직속상관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1894년 12월 26일자로 올린 <살해보고서>이다. 본 문건은 <독립기념관> 소장본이다. 그런데 최근에 <OOO신문>에서는 마치 본 문건이 <박OO> 교수가 발굴해 놓은 특종감으로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본 문건은 이미 <독립기념관> 안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단, <박OO> 교수께서 <미야모토 타케타로>의 정체를 밝혀 낸 것은 바람직한 공과이기에 격려를 보낸다: '1894년 동학 농민혁명 때 일본군 대본영이 조선에 파병한 '동학당 토벌대'로 농민 학살에 앞장섰던 하급 장교가 1895년 10월의 '명성태황후 시해' 때도 핵심 구실을 한 주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드러났다.' <자세히보기>.

그러나 이것도 이미 2010년에 <강범석> 교수님은 '마야모토'에 관한 신분을 다소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미야모토는 1894년 4월 후비 육군조장(상사)으로 소집돼 후비 보병 제18대대에 입영하고, 7월 29일 '사관사무 취급', 8월 14일 '예비사관'이 되고, 10월 11일자로 '육군보병소위'가 됐다. 미야모토가 소속하는 후비 독립 제18대대는 10월 28일자로 주한일본 각급공관의 '경비', 거류민의 '보호', 주한공사의 대한사업(大韓事業)의 '원조'를 위해 '대영본 직할' 부대로 파견됐다.

    <강범석, '왕후모살', 서울:솔출판사, 2010, p.22> (화중광야소장).


그리고...

    '일본 흉도(사무라이/낭인/장사)가 곤녕전(坤寧殿/왕비의 숙소)에 돌입해 들어왔고, 수 명의 궁녀들이 살해되었고, 얼마 안 있어 의녀가 와서 왕비의 얼굴에 손수건을 덮었다. 흉도 하나가 왕비를 확인하기 위해 왕비의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though it was said that one of them had a photograph of the Queen in his hand by which he was trying to to identify her.

    <김문자 지음/김승일 옮김, '명성태황후 시해와 일본인', 파주:태학사, 2011, p.53-55> (화중광야소장). <원제/ '朝鮮王妃殺害と日本人', 東京: 高文硏, 2009>.


위에서 보듯이, 재일교포 <김문자> 교수님은 보다 심도있게, <명성태황후의 암살> 주범이 황후의 어진을 그의 손 안에 들고 있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진실을 접하는 순간, 필자는 설레임에 가득차 있었고...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여운은 가시지 않고 있다. 아니, 필자가 이 땅에서의 <명>(命)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도 사그러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아직 <미완성 필적>을 따라서 진행 중이지만...<명성태황후의 어진>이 이 지구 땅 어느 곳에서인가 <보존>되어 있음을 확신하게 되는 그 근거는 2013년 1월 19일 <서울역사박물관> 전시중에 아들 <다니엘정>과 함께 관람하면서...느꼈던 그 필링을 아직은 공개하지 못하고 있지만...조만간 밝히게 될 글에서...자신있게 <명성태황후의 어진>은 존재하고 있음을 천명할 계획이다!! <2013. 9.1/새벽기도 중에>

                       

[BGM RunTime-22:01][곡목/한반도의 슬픈소리 '진도상여소리'/조공례-김대례-박동매-박병천] <화중광야녹음 제공>. 유명을 달리하신 <명성태황후>님의 혼백이라도 안주시켜 드리고파서 올린다!! [BGI]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1993, p.199> (화중광야소장) ㅡ [필독관련자료] [정뎀보의 돌개바람ㅡ乭介風] 프로로그 (2) ㅡ '무흔족(無痕足)' <자세히보기>.

[이미지/화중광야제작 제공]
프랑스 신부 '아베레크'가 찍은 <명성태황후>의 국장 장례식 광경이다.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1993,p.199>. (화중광야 소장). 하단 원(圓) 안은 유일하게 건져낸 <명성태황후>의 타다 남은 손가락 세 개를 싼 모습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가...죽어서까지도...이 모양으로 만든 왜놈들의 만행은 반드시 예호바의 심판을 받는다!!


왜놈의 하수 육군 소위 ①<미야모토 타케타로>(宮本竹太郞)의 사진이 공개되지 않음은...약 700여명의 순진한 우리 '동학농민'을 살해한 천인공로할 죄악으로 인하여 '후환이 무서워서'(??) 고의로 사진을 공개 못한 것임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기에 이 자 외에도 <명성태황후 암살> 주도자들인 ②'데라자키 다이키치'(寺崎泰吉/1862-??/당시 33세), ③'나카무라 다테오'(中村楯雄/1863-??/당시 32세), 그리고 ④'토오 가쯔아키'(藤勝顯/1855-??/당시 40세)의 사진을 일본은 공개할 수 없다해도...영국 <MI6> 안에와 바티칸 지하서고 안에는 필경 있을 터...아울러 <명성태황후 어진>도 함께 있을터...머지 않아...세상에 밝히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이는 <역사적 진실> 속에는 완전범죄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다는 적정 논리 때문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얼굴' '미야모토 다케타로'의 사진도 숨겨져 버렸다!! 떳떳하지 못한 비양심적인 왜놈들의 소행이 여실히 드러나는 '역사적 진실'이다!!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의 어진(御眞)은 반드시 있었음에 틀림없다!!' [1]> <자세히보기>.

        

[맺으면서...]

청국의 <서태후>와는 달리 <명성태황후>는 우리 <대한민족>(THE GREAT KHAN)에게는 그 얼굴 모습조차도 확인되지 않은, '얼굴없는' 국모이시다. 교과서나 많은 서적, 자료에 <민비> 혹은 <명성태황후>의 <사진>이라고 게재되었던 사진들은 여러 사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실은 태황후 본인이 아니라는것이 판명되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출판된 서적, 잡지까지 추척하여 본 결과, 그 최초의 게재 잡지는 일청전쟁중 발행한 일본의 사진화보란 사실이 밝혀졌다. 그 촬영된 여자는 <명성태황후>가 아니라 궁정의 궁녀였음이 판명되였다.

<명성태황후 어진>이라고 지칭된 사진이나 그림은 여러장 있으나, 그 진가에 대한 논난 역시 치렬하지만, 지금까지 태황후의 <어진>(진짜 얼굴)을 확인할 수 없다. 태황후께서 암살당하신 후 고종이나 조선황실에서 그분의 <어진>을 구하기 위해 현상금까지 걸어 수소문했으나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문일평/記錄이 없다하여서 모든 과거의 痕跡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자세히보기>.

그렇다면 <명성태황후>를 가까이에서 접견했던 서양 여자들(릴리아드 언더우드/이사벨라/비숍/파크스 등)이 기록해 둔 인상만이라도 고이 간직하란 말인가?? 아니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

128년년전 유린당한 우리 <대한민족>과 <대한국> 같이 얼굴모습도 확인되지 못한채 <잃어버린 얼굴로 남아있는 국모의 용모>, 우리 민족의 깊은 슬픔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2013. 9.2/이른저녁>

<Created/20130901> <Updated/201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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