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두 녀식에게 전하는 선물] 구비구비 흐른 물이 섞지 않듯이 ㅡ 일제강점기 금지곡 제1호 <황성옛터>는 <호수돈여학교>에서 태동되다!!

<황성옛터> ㅡ 작곡가 <전수린> 자신의 비감한 심경이 오선지 위에 흘러내리다!!

정리/ 정재선 목회자

1916년 개성의 <한영서원>(송도고등보통학교 전신)<호수돈여학교>에서는 비밀리에 <영웅의 모범>이라고 하는 '애국창가집'(愛國唱歌集)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영웅의모범>이미지/음원]<네이버지식백과/자세히보기>. <명성태황후 암살> 이듬해 1896년부터 한국의 민간인들 사이에서 불리워진 노래가 1910년 한일병탄후 독립가로서 정립되었다. 한편, 미국남감리회가 설립한 개성 소재의 두 크리스투교 학교인 <호수돈여학교>(캐롤 여선교사 설립)와 <한영서원>(윤치호 설립=송도고등보통학교 전신)은 1916년에 이 노래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학생들에게 배포하여 민족교육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민족교육의 하이라이트는 <황성옛터>의 노래가사 속에도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오른쪽상이미지>
여학생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던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이 가사실습을 하고 있다.
<'빛과 소금', 1986년 5월호, p.183.>. <오른쪽중이미지> 크리스투교 교육과 집회행사를 위한 큰 강당이 필요하자, 당시 교장 <니콜스> 여선교사는 1920년 미국 북캐롤라이나 지방회로부터 $1008을 받아 본 강당을 건축하였고,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웨이트만 훔버트 기념관>(Wightman Humburt Memorial) 이라고 불렀다. <호수돈여중고등학교, '호수돈백년사', 서울:홍익전자출판, 1999, p.140> (화중광야 소장). <하단이미지> 1906년에 윤치호는 개성에 <한영서원>(韓英書院)을 창립하였고, 1903년에 설립된 <두을라학당>(Tallulah Haktang)을 통합하여 <이덕주, '한국감리교 여선교회의 역사:1897-1990.'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전국연합회, 1991, p.130> (화중광야 소장), <송도고등보통학교>에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이 학교가 오늘의 인천 소재 <송도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위 이미지의 하단(왼쪽)은 1927년의 학교 전경모습이요, 오른쪽은 그 당시의 교내 <크리스투교서클> 임원들의 모습이다. <송도의역사관/자세히보기>.

마침 <크리스투교서클> 회원이었던 학생 <전수남>('전수린'의본명)도 이러한 복장으로 <호수돈여학교>의 <니콜스> 교장으로부터 바이올린을 제대로 사사받았으니...이 어찌 <황성옛터>의 발판이 아니었던가!!


이와 함께 전통적 교육기관인 서당(書堂)에서도 민족교육이 이루어졌다. 일본이 강점하면서 사립학교의 규제를 강화하자 뜻있는 많은 인사들이 설립이 손쉬운 서원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총독부는 서당규칙까지 만들면서 이마저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서당에서의 민족교육은 3·1운동 중 전국 각지에서 흔히 있었던 서당 훈장과 생도가 3·1운동을 추진·전개하는 주체적 역량이 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경기도의 민족독립운동/자세히보기>.

'내 민족이 일제식민지 통치 하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만월대에서 화려하던 옛날을 회상하며 말없이 여관으로 들어왔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급기야 며칠동안 굶주린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때 이곳의 악상이 떠올랐습니다.' <'황성옛터' 작곡가 전수린의 회고>

◆본 이미지는 대한민족 미학 개척자이신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1905-1944) 선생이 분단전 <개성박물관장>(1933-1944)을 지내면서 손수 답사하셨던 개성 고려왕궁의 폐허인 <만월대>(滿月臺)의 회경전(會慶殿)의 석단 전경이다. 작곡가 전수린 선생이 1927년에 이 모습을 떠올리면서 작곡한 것이 바로 <황성옛터>(원곡명=황성의적)인 것이다!! 최근에 필자가 입수한 자료들은 이런 모습이 아니다. <高裕燮, '松都古蹟: 高裕燮全集 4'. 서울: 동방문화사, 1993, p.94> (화중광야 소장).


◆[이미지/화중광야제작 제공]. 곡목/황성옛터(원곡/황성의적) ㅡ 작사/왕평 ㅡ 작곡/전수린(1927작곡) ㅡ 노래/이애리수(1932녹음) <신나라 45rpm 복각판/화중광야녹음 제공>.


<1>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2>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러/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3>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발길 닿는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심사를 가슴속 깊이 품고/ 이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황성옛터=원곡명/황성의 적/荒城의跡]
1920년대는 만주 신흥무관학교와 청산리 싸움의 승리로 독립의 의병과 임시정부를 돕기위해 독립자금을 비밀리 보내는 시기였다. 초창기 현대가요인 '황성옛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개성 출신 작곡가 <전수린>(全壽麟=본명/전수남/全壽南/1907-1984)이 고려궁터 <만월대>(滿月臺)를 찾아 '월색만 고요한 폐허' '성이 허물어진 빈 터'를 애달파 하였다. <전수린>이 <홍난파>가 채보한 조선궁중악 중에서 동동곡의 소리를 모방하여 '황성옛터'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궁중을 의식하는 소리로 만들었다. 그의 나이 스무살 때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당시 순회극단의 극작가 겸 배우인 왕평(王平)이 이 가락에다 가사를 붙였고, 노래 제목을 <황성의 적>으로 하고 연극단의 소녀배우이던 <이애리수>(李愛利秀/본명=이음전/李音全/-2009)에게 부르게 하였다. <이애리수>는 이 노래로 일약 가수가 되었다. 이 때가 1927년과 1930년대초라는 기록들도 있어 엇갈리기도 한다.


◆[이미지/화중광야 제공]. <황성옛터>가 작곡된 개성군 배천면(白川面)에 소재한 <배천여인숙>(白川旅人宿=한자표기/白川/'백천'이 아니라 '배천'으로 읽는다)에서 '대한민족'의 나라잃은 설움과 그 흘러나오는 심금을 가장 리얼하게 묘사한 <황성옛터>가 개성 출신 <전수린>(20세)의 바이올린으로 울려 퍼졌다!! 1927년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노래는 1927년에 천한수 작, 천한수 연출로 된 <류랑의 남녀>의 공연단체에 망라되어 순회공연을 하던 도중 <배천여인숙>에서 작곡가가 고향인 만월대가 그리워져서 창작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1927년에 창작된것이 틀림없다고 본다. 그리고 공연단체가 서울로 돌아와 <단성사>에서 연극을 공연하던 막간에 이애리수가 노래를 불러 관객들의 절찬을 받았다. 그후 1930년대초에 <이애리수>가 <빅타레코드>에 이 노래를 취입하였다. 그러니 이 노래의 창작년대(1927)와 취입년대(1932)는 다르다고 전한다. 한편, 이런 내용을 알아내어 당시 조선총독부는 '황성옛터' 음반판매를 금지시켰다. 조선인의 민족감정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내 민족이 일제식민지 통치 하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만월대에서 화려하던 옛날을 회상하며 말없이 여관으로 들어왔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급기야 며칠동안 굶주린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때 이곳의 악상이 떠올랐습니다.' <'황성옛터' 작곡가 전수린의 회고>


[<황성옛터>는 <호수돈여학교>에서 태동되다!!]

◆[이미지/화중광야제작제공] <배경이미지> <金根洙, '朝鮮在留歐美人調査錄-1907年-1942年', 韓國學硏究所(中央大學校永信아카데미附設), 1982, p.274-275> (화중광야 소장). 본 자료는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 한국 주재 외국인들의 동태를 파악해 놓은 자료이다. 미혼이신 <니콜스>(Nichols, Lillian E.) 여선교사님이 <호수돈여학교 교장>에 재직중(1921-1937)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증거자료이다. 저자이신 '김근수' 교수님은 필자가 중앙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근무시(1976-1978) 모셨던 분이다. <왼쪽이미지/니콜스교장> <호수돈여중고등학교, '호수돈백년사', 서울:홍익전자출판, 1999, 속페이지화보> (화중광야 소장). <오른쪽이미지/전수린작곡가>. 전수린 작곡가의 20대의 모습이다. (화중광야제공).



'전수남'(전수린의 본명)은 개성 소재 <송도고등보통학교>(松都高等普通學校/4년제 과정=일본인 설립학교는
5년제로서 차별을 둠으로써 아주 악랄했던 왜놈들의 치적을 엿볼 수 있다!!)
재학중에 개성의 신문화운동모임인 <에비츠소년음악회>에서 '장봉손'(張奉孫)으로부터 바이올린을 처음 배웠고, '크리스투교' 가정에서 태어난 '전수남'은 이 때 '크리스투교서클'에서 서양음악을 접했으며, 마침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學校=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4년제 과정) 교장 '니콜스'(Nichols) 여선교사로부터 정식으로 바이올린과 악전(樂典)을 사사받았다.


◆호수돈여고교장(好壽敦女高校長) 王來女史就任(왕래여사취임) 【開城(개성)】개성부내 호수돈녀자고등보통학교 전교장 니클스(芮吉秀/예길수)여사는 전년안식년으로 귀국하엿다가 신병으로 도라오지못하게되매 금번동교창립에 공이만흔 왕래(王來)여사가 동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엇다한다. <1938.3.12 동아일보 발행>. (화중광야 제공).

이른바 <호수돈여학교> 발전의 공로자의 한분이신 <릴리언 E. 니콜>(Lillian E. Nichols/한글명=芮吉秀) 여선교사가 1937년 안식년차 귀국하였다가 1938년 신병으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자, 제2대 교장을 지낸 <엘라수 캔터 와그너>(Ellasu Canter Wagner/한글명=王來) 여선교사가 제4대 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호수돈여학당의 초석을 일군 2대, 4대 학장/자세히보기>.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니콜스> 교장이 회고록을 남기셨다면...전수남(전수린의 본명) 남학생에게 바이올린과 악전(樂典)을 가르쳤을 때의 숨은 이야기(멋진 회고)를 얻을 수 있을 텐데...참으로 안타깝다.


그러나 바이올린을 '깡깽이'로 폄하하였던 부친의 반대 때문에, 전수남은 15살(1922년)이던 3학년 재학을 포기하고는 서울로 가서 '홍난파'가 운영하던 <연악회>(硏樂會)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전수남은 21세 때 무용가 조택원(趙澤元)의 소개로 순회공연 극단인 <동방예술단>(東方藝術團)에 가담, 배경음악을 연주하는 악사가 되었다. 전수린의 연예인의 내력은 별도주제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필독관련자료] [뎀보의 세월따라 노래따라] 1932년 일본 엔카의 효시는 1928년에 발표한 '황성옛터'를 모방한 것이다 <자세히보기>.


<Created/20130823> <Updated/201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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