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중광야 복음선교문서 컬렉션 15] 8복(八福)과 8화(八禍) - [2]

 

'이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해 오셨고, 우리에게 은혜를
통하여 영존하는 위로와 좋은 소망을 주셨던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가 너희
마음들을 위로하시고, 너희를 모든 선한 말씀과 일 안에 세우시니라.'

(데살로니카후서 2:16-17 / KJV화중광야역)


●본 자료는 필자가 심혈을 기울려 곧 최초로 공개하게 될 '<70년 사로잡힘>과 <한 때, 여러 때, 반 때>의 상관성!!'의 맺는말 부분에 적합하다 판단되었기에...밝혀드립니다!! 특히 본 글은 <2008.9.19>에 올린 것인데...5년 5개월이 지났는데도...이번에 심혈을 기울여 올리는 본 주제의 결말부문에 합치됨에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샬롬!! <2013.4.18/깊은밤>.

<70년 사로잡힘>과 <한 때, 여러 때, 반 때>의 상관성 제언 [1] <2013.4.19/오후> (자세히보기).

 

8복(八福)과 8화(八禍) - [2]

자기 속에 '자랑' 곧 '겸손한 교만'을 쌓아두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모임' 안에서는 이러한 '조건과 공로'를 절대 금지한다!!

[화중광야 복음선교문서 컬렉션 14]
8복(八福)과 8화(八禍) [1]
8복(八福)은 '참십일조'(제자들/너희들)의 것
<
필독관련자료/자세히보기>


글/ 정재선 목회자

 

우리는 모두가 은혜 아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내가 깊은 신앙심에 들어가 있는 것은 내 스스로에게 복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심판권도 정죄권도 없다. 그것으로 인하여, 서로 유혹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마태복음 23:13>에서 화를 내셨듯이, 우리 모두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의 그 왕국을 닫아버리게 만들고,' 자기들이 불러 모아놓고는 자기들 보다 더 종교적인 자들을 만들어 내는 악순환을 겪게 되는 것이다. '모임'(회중/CONGREGATION)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임'은 하나님이 '잃어버리신 자녀들을 되찾아 놓은' 무한히 용서받는 곳이요, 오직 하나님 앞에 서서 은혜를 입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으로부터 '8복'(八福)을 받게 되는 곳이요, 그렇지 못하면 철두한 종교인으로서 '8화'(八禍)를 받게 되는 곳이다!! 본란에서는 이 '8화'(八禍)를 피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현상을 <사무엘상 5:1-9>을 중심으로 펼쳐보기로 한다.


필자는 지난 주에 <가정예배 가이드>에 올린 칼럼 '행위의 탯줄을 끊어라'(자세히보기)를 정리하던 중에 한 가지 새로운 성경적 진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예루살렘의 회복' 즉 예루살렘이 원상대로 복구되어야 하는 그 과정을 예수님이 손수 알려주신 것이다.

    5:1And the Philistines took the ark of God, and brought it from Eben-ezer unto Ashdod.
    5:1그리고 그 필리스틴(필리스티아/블레셋)인들이 하나님의 그 궤를 취하였고, 그것을 에벤에셀로부터 아스돗에로 가져 왔더라.

    5:2When the Philistines took the ark of God, they brought it into the house of Dagon, and set it by Dagon.
    5:2그 필리스틴인들이 하나님의 그 궤를 취한 후, 그들이 그것을 다곤의 그 집 안으로 가져 왔고, 그것을 다곤 곁에 두었더라.

    5:3And when they of Ashdod arose early on the morrow, behold, Dagon was fallen upon his face to the earth before the ark of the LORD. And they took Dagon, and set him in his place again.
    5:3그리고 아스돗의 사람들이 다음 날 일찍 일어났는데, 보라, 다곤이 주님의 그 궤 앞에 쓰러져 그의 얼굴이 그 땅에 닿았더라. 그리하여 그들이 다곤을 취하였고, 다시 그 자리에 세워 두었더라.

    5:4And when they arose early on the morrow morning, behold, Dagon was fallen upon his face to the ground before the ark of the LORD; and the head of Dagon and both the palms of his hands were cut off upon the threshold; only the stump of Dagon was left to him.
    5:4그리고는 그들이 다음 날 일찍 일어났는데, 보라, 다곤이 주님의 그 궤 앞에 쓰러져 그의 얼굴이 그 땅바닥에 닿았고, 그리고 다곤의 그 머리와 그의 양 손목은 그 문지방 위에 끊어져 있었고, 다곤의 그 몸통만 그 자리에 남아 있더라.

    5:5Therefore neither the priests of Dagon, nor any that come into Dagon's house, tread on the threshold of Dagon in Ashdod unto this day.
    5:5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당 안으로 들오는 자는 아무도 오늘이 이르도록 아스돗 안의 다곤의 그 문지방을 밟지 못하였더라.

    5:6But the hand of the LORD was heavy upon them of Ashdod, and he destroyed them, and smote them with emerods, even Ashdod and the coasts thereof.
    5:6그러나 주님의 그 손(그 심판)이 아스돗의 사람들 위에 임하셨으니, 그 분이 그들을 멸망시키셨고, 그들을 악성 종기들로 치셨으니, 곧 아스돗과 그 지경까지였더라.

    5:7And when the men of Ashdod saw that it was so, they said, The ark of the God of Israel shall not abide with us: for his hand is sore upon us, and upon Dagon our god.
    5:7그러자 아스돗의 사람들이 일이 그렇게 된 것을 보았고, 그들이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그 하나님의 그 궤를 우리 곁에 두지 말라. 이는 그 분의 손이 우리 위에와, 우리 신 다곤 위를 치시는도다.' 하더라.

    5:8They sent therefore and gathered all the lords of the Philistines unto them, and said, What shall we do with the ark of the God of Israel? And they answered, Let the ark of the God of Israel be carried about unto Gath. And they carried the ark of the God of Israel about thither.
    5:8리하여 그들이 (사람들을) 보냈고 그 필리스틴인들의 모든 군주들을 그들에게로 모이게 하였고, 말하기를, '우리가 이스라엘의 그 하나님의 그 궤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이스라엘의 그 하나님의 그 궤를 가드를 향하여 옮겨 가라.' 하더라. 그리하여 그들이 이스라엘의 그 하나님의 그 궤를 거기로 옮겼더라.

    5:9And it was so, that, after they had carried it about, the hand of the LORD was against the city with a very great destruction: and he smote the men of the city, both small and great, and they had emerods in their secret parts. (1Samuel 5:1-9/ KJV)
    5:9리하여 일이 그렇게 되었고, 그들이 그것을 옮겨 놓은 후에, 주님의 그 손이 심히 큰 환란으로 그 성읍을 치셨도다. 그리고는 그 분이 그 성읍의 그 사람들을 작은 자나 큰 자나 치셨고, 그들의 은밀한 부분들 안에 악성 종기들이 생겼더라. (사무엘상 5:1-9/ KJV화중광야역)


아스돗이란 성읍이란 오늘날도 존재하고 있으며, 예루살렘으로부터 서쪽 약53키로미터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필리스틴(블레셋)인들의 다섯 주요 성읍들 중 한 곳이었다. 위 본문은 필리스틴인들이 이스라엘을 침입하여 이스라엘을 패배시키 후 하나님의 그 궤를 빼앗아 가져다가, 자기네 다신론적 종교의 대상인 다곤의 산당 안에 다곤 신상 곁에 두고부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셨다는 내용이다.

[카이로스에 대한 교훈 - 실패하는 신앙]

하나님은 선민들인 이스라엘로부터 보호받지 못하시고서, 적지에 끌려 가셨다가, 거기서 하나님이 승리하신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왜 하나님은 하나님되심을 이스라엘과 함께 하여, 전쟁에서 이기는 식으로 하시지 않고, 패배시키시고, 자신이 포로가 되어 가심을 겪으신 후에, 역전시켜서 승리를 만들어 내시는가?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존재한다. <말라기 1:11>:

    1:11For from the rising of the sun even unto the going down of the same my name shall be great among the Gentiles; and in every place incense shall be offered unto my name, and a pure offering: for my name shall be great among the heathen, saith the LORD of hosts. (Malachi 1:11/ KJV)

    1:11따라서(희생제물 거부) 해가 뜨는  곳으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향하여 나의 이름이 이방민족들 가운데서 크게 될 것이요, 그리고 모든 곳에서 나의 이름을 위하여 향이 피워질 것이요, 하나의 순결한 제물이 드려질 것이니, 이는 나의 이름이 이방민족들 가운데서 크게 될 것이니,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말라키 1:11/ KJV화중광야역)


왜 하나님은 밖에서 곧 이방민족들 가운데서 영광을 나타내시는가?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과는 함께 왜 그 영광을 나타내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이 특별히 선민으로 뽑으셨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약속하신 이스라엘은 신앙적으로 볼 때 실패하였고, 바빌론의 '사로잡혀감'(CAPTIVITY)으로 인하여 끝이 나고 만다. 물론 70년 후에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만 말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빌론의 '사로잡혀감'으로서 실패하고 만다. 이것은 '카이로스'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 속에 숨겨져 온 하나의 테제가 된다.

[크로노스에 대한 교훈 - 성공하는 신앙]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지 않으시고, 실패케 하셔서, 이방민족들에게 사로잡혀 가신 남의 땅, 그것도 그들이 숭배하는 거짓신 다곤의 신당 안에서 그들에게 승리를 드러내시는가?

이스라엘의 실패 원인 중 하나는 이렇다. 하나님은 종교라고 이름으로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법궤를 모셔오면 당연히 필리스틴(블레셋)인들과의 전쟁에서 이길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이런 신앙에 대하여 찬물을 끼얹는 것은, 하나의 중대한 크리스천 신앙의 오해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졌던 확신은 예배의식, 할례, 제사제도, 율법 등이었다. 그러나 이런한 것과는 전혀 무관한 이방민족들 가운데서 승리한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배의식, 할례, 제사제도, 율법 등의 수단으로 하나님을 매이게 할 수 있다고, 조작하고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지적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기록들 속에서 내내 이러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오해와 실패를 구약 안에서 보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확인하고 분명히 해야 하는 크리스천 신앙의 첫 번째 근거인 것이다.

그 실례가 모세의 경우이다. <출애굽기 3:13>을 읽자:

    3:13And Moses said unto God, Behold, when I come unto the children of Israel, and shall say unto them, The God of your fathers hath sent me unto you; and they shall say to me, What is his name? what shall I say unto them?
    3:13그러자(모세를 부르심에)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말씀드리기를, '보소서, 내가 이스라엘의 그 자손들을 향하여 가서, 그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너희 조상들의 그 하나님이 나를 너희를 위하여 보내주셨다' 라고 말할 것인데,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그 분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을 향하여 말하리이까?' 하였다.

    3:14And God said unto Moses, I AM THAT I AM: and he said, Thus shalt thou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I AM hath sent me unto you. (Exodus 3:13-14/ KJV)

    3:14그러자 하나님이 모세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곧 스스로 있는 나니라' 하시더라. 그리고 나서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의 그 자손들을 향하여 이같이 말할지니, 나이신 분이 나를 너희를 위하여 보내주셨느니라.' 하라.' 하시니라. (출애굽기 3:13-14/ KJV화중광야역)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심에 강한 의심과 불만이 배어 있다. 40세였던 파라오 밑에서 있을 때는 불러주지 않으셨다가, 미디안 땅 저 광야 안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초라한 목자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 늙은 80세 때에 불러주시는데 대한 강한 불만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왜 이런 일을 이런 식으로 하십니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이것이다: '나는 곧 스스로 있는 나니라 - I AM THAT I AM'

이 '스스로 있다'는 표현 - 하나님은 '하나님되심'에 그 조건이나 그 내용에 있어서, 외부에 도움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 분이요,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의 존재로서, 능력으로서 외부의 것과 연결(의존)되어 있지 않으심을 말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존하시고 자족하시고 충만하신 분이다. 외부적인 것이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이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디모데후서 2:13>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스스로를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다고 증언한다:

    2:13If we believe not, yet he abideth faithful: he cannot deny himself. (2Timothy 2:13/ KJV)

    2:13만일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 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곧 그 분은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음이라. (디모데후서 2:13/ KJV화중광야역)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하시고, 변형하시고, 왜곡하시거나, 차별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늘 완전하시고 충만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고, 능력자이시고, 유일하신 권위이시다.

이 하나님은 먼저 뜻을 가지시며 계획하시며, 그 방법을 정하시며, 내용을 만드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기록들에 대한 곡해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만을 필요로 하고, 목적과 내용은 우리가 정한 채, 하나님을 결론짓는 '끝내기식' 이름으로 조종하려는 실수를 능히 범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실패인 것이다.

그래서 계속 이스라엘 안으로 우상이 등장한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우상이란 능력은 갖추고 있으나, 그 생각은 없는 존재이다. 그 우상에게 내가 필요한 것,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우상이 만족하는 것을 주어, 필요를 얻어내는 능력만을 취해 가려는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우상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우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시는 것이 위 본문 '필리스틴인'(블레셋인)에서 하나님이 이기신 사건의 중요한 테제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지경 밖에서, 곧 이방민족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너희가 내게 진심을 바친다, 나를 예배한다, 나를 찬양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나를 붙잡아 너희들의 목적과 수단으로 쓰려고 하지 말라. 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실패를 꾸짖는 것이 바로 선지자 호세아였다:

    4:6My people are destroyed for lack of knowledge: because thou hast rejected knowledge, I will also reject thee, that thou shalt be no priest to me: seeing thou hast forgotten the law of thy God, I will also forget thy children. (Hosea 4:6/ KJV)

    4:6나의 백성들이 지식의 부족으로 멸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또한 너를 거부하겠으니, 너는 나에게 제사장이 되지 못하리라. 이는 네가 네 하나님의 그 율법을 잊어먹었으니, 나도 또한 너의 자손들을 잊어버리겠노라. (호세아 4:6/ KJV화중광야역)


무슨 지식이 부족하여 멸망한다는 것인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한 것이다. 이해와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그 시작'(창세기 1:1. 요한복음 1:1)이시고, '그 과정'이시고, '그 결말'(그 완성/텔로스)이신 유일하신 창조자이심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 분이 정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정하고, 내가 만들고, 내가 욕심내는 것을 얻는 방법으로서' 하나님을 쓰려고 한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꾸중하시고 책망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이런 하나님을 수단과 방법으로 쓰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인간의 생각들은, 이 하나님을 내가 믿고, 내가 섬긴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다르다는 자기 증명으로 쓸 수 있다는데, 더 큰 무서움이 존재한다.

[자신도 모르는 '겸손한 교만'을 버려야]

하나님이 이처럼 이스라엘의 실패를 누누이 꾸짖으시는데, 그 반복된 이스라엘의 실패가 신약에까지 이어진다. <로마서 10:1-3>을 읽는다:

    10:1Brethren, my heart's desire and prayer to God for Israel is, that they might be saved.
    10:1형제들아,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마음의 소망과 기도는 그들이 구원을 받도록 하는 것이라.

    10:2For I bear them record that they have a zeal of God, but not according to knowledge.
    10:2따라서 내가 그들을 증언하노니,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은 아니니라.

    10:3For they being ignorant of God's righteousness, and going about to establish their own righteousness, have not submitted themselves unto the righteousness of God. (Romans 10:1-3/ KJV)
    10:3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 나름의 의를 세우려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그 의를 향하여 복종치 아니하였음이라. (로마서 10:1-3/ KJV화중광야역)


이스라엘이 실패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내세웠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태복음 23장>을 읽는다:

    23:13But woe un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e shut up the kingdom of heaven against men: for ye neither go in yourselves, neither suffer ye them that are entering to go in.
    23:13그러나 위선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래새인들아, 너희를 향하여 화(禍)가 이르리라! 이는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원어/그 하늘들/마태복음 6:9,10)의 그 왕국을 닫아 버림이라. 아울러 너희 자신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너희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도 막아버림이라.

    23:15Woe un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e compass sea and land to make one proselyte, and when he is made, ye make him twofold more the child of hell than yourselves. (Matthew 23:13,15/ KJV)
    23:15위선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래새인들아, 너희를 향하여 화(禍)가 이르리라! 이는 너희가 한 사람의 개종자를 얻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그가 구해지면, 너희는 그를 너희 자신들보다 더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도다. (마태복음 23:13/ KJV화중광야역)


여기서 말하는 '위선자들'(hypocrites)이란 '외식하는 자들, 겉치장 하는 자들', 곧 '뱀의 후손이요, 독사의 세대'인 것이다(마태복음 23:33). 그렇다면 무엇을 치장하는가?

그들 자신에 대한 신앙이 남다른데 대한 증거에 불과한 것이었다. 저들이 하나님을 섬긴다, 쉽게 표현하면, 예수를 믿고 크리스천 신앙을 가진다는 저들의 종교심성(宗敎心性)이 다른 사람들의 것 보다 우월하다는 자기 증명 밖에는 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시작이시고, 이유이시고, 처음이시고 마지막이시고, 그러한 능력자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은혜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 속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은혜로우심에 크리스천 신앙이 서 있는데, 이처럼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외면하고, 내가 하나님과 남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면, 크리스천 신앙은 설자리가 없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를 잃게 된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23:13그러나 위선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래새인들아, 너희를 향하여 화(禍)가 이르리라! 이는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원어/그 하늘들/마태복음 6:9,10)의 그 왕국을 닫아 버림이라. 아울러 너희 자신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너희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도 막아버림이라.


'하늘들의 그 왕국'은 예수 그리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와 긍휼로 입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자기들의 종교(신앙)라는 것이 남다르다며, 이 남다름으로 인하여 '하늘들의 그 왕국'에 입성한다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는데, 이것은 크리스천 신앙의 큰 걸림돌인 것이다. 만약에 당신이 예수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저러니까, 지옥가지...저러니까, 예수 안 믿지...'


하고 이런 마음을 품는다면, 당신은 구원과 예수 믿는 자 된 것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우월감을 가지고 있고, 당신이 얻은 구원이 자격이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불쌍한 것들...'


이것은 우리 마음 속으로부터 자생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요, 우리의 본성은 늘 상대를 경멸하게 되어 있다. '불쌍한 것들'이라고 경멸해서는 안 된다. 늘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내내 이런 '겸손한 교만'에 의해서 실패를 거듭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이들의 신앙에 관해서 이렇게 분명하게 가르치신다:

    5:20For I say unto you, That except your righteousness shall exceed the righteousness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e shall in no case enter into the kingdom of heaven. (Matthew 5:20/ KJV)

    5:20따라서 내가 너희를 향하여 말하노니, '너희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그 의보다 뛰어나지 못하면, 너희는 결코 하늘(원어/그 하늘들)의 그 왕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5:20/ KJV화중광야역)


여기에서 '의'는 자신의 신앙의 우월감에서 비롯된 '자기 의'에 대한 증명용으로서 되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은혜 아래에 있다는...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한 '의'이어야 한다. '자기 의'를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지 못하면 이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혼동시키고, 오해시키는지를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밖에는 이해를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통렬하게 꾸중을 듣게 된 것이고, 지금 <사무엘상 5장>에 와서는 필리스틴(블레셋)인들에게 곤욕을 치루고 있는 것이요, 그리고 바빌론의 '사로잡혀감'을 당하고, 결국은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을 대신하여 '고난의 그 나무'('십자가'는 비성경적 용어)에 달려 죽으셔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신앙이라는 것, 즉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신앙고백과 내용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공로나 조건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올 자격이 있고,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할 조건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크리스천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예로 <로마서 5:6-8>을 읽는다:

    5:6For when we were yet without strength, in due time Christ died for the ungodly.
    5:6따라서 우리가 아직 연약하였을 때, 때가 되어 그리스도가 경건치 않은 자들 때문에 죽으셨느니라.


    5:7For scarcely for a righteous man will one die: yet peradventure for a good man some would even dare to die.
    5:7이는 의인을 위하여 죽으려는 자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하여 감히 죽으려는 자가 혹 있을지 모르겠노라.

    5:8But God commendeth his love toward us, in that, while we were yet sinners, Christ died for us. (Romans 5:6-8/ KJV)
    5:8그러나 우리가 이직 죄인들이었을 때, 그리스도가 우리 때문에 죽으셨으니, 이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을 나타내시느니라. (로마서 5:6-8/ KJV화중광야역)


위 본문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하였을 때' '우리가 이직 죄인들이었을 때'라는 것은, '우리가 아무런 자격과 조건이 없었을 때'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필요를 위하여 기도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갚아 주셔야 할 만한 어떤 조건도 만들어 낼 수 없었던 때였다. 하나님이 이유가 되셔서, 먼저 시작하셔서, 먼저 구원이 이루어 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로마서 10:1-3>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 처럼,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한테 받은 '그 은혜와 그 구원'이 마치 우리에게 이유가 있기 때문인 것처럼 항상 생각하는 족속이다. 이것이 인간의 죄인 본성이니, 곧 자기 안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본주의에 입각해서 생각하면, 인간은 괜찮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존재와 내용을 만들어내는 것을 만족하지 않으셨다. 그 분이 우리를 만드실 때, '신적 지혜와 능력과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다'는 것이 크리스천 신앙의 기본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으로 만들고 싶으셨나?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고 싶어 하신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내용으로 하고 싶어하시는가? '하나님을 닮은 자'를 만들려고 하신다. 거룩한 자, 의와 진리와 평강과 영광을 만들려고 하신다. 세상을 주는 것 보다 하나님을 주려고 하신다. 이 문제 때문에 항상 신앙의 갈등이 벌어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며, 올바른 기도를 할 줄 모르는 실패가 반복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하거나, 어떤 신앙적인 헌신을 할 때, 그것이 하나의 공로로, 하나의 조건으로 이루어진다는 그런 기분을 가지는 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이런한 조건들을 제외시키면, 대개 신자들은 자신없음을 느끼곤 한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충분히 '그게 아니다'라고 설명을 해주면서도, 자기들이 기도할 때는 어떤 조건을 만들어야겠다고 하면서 열심을 내어 기도한다. 이것이 잘못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조건으로 삼으려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철야기도를 한다든지, 단식기도를 한다든지, 혹은 울기라도 해야 하나님이 응답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간절함을 표현함은 하나님이 받아주시지만, 그것을 조건으로 내세움은 안 되는 것이다.

여기서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대강 믿고 있다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때는 기도를 잘 못하게 된다. 기도를 할만큼 무언가 미리 쌓아 놓고 나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부르는 자녀의 신분을 스스로 놓치고 만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든지, 어떤 문제에서든지, 조건에 상관없이 항상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이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과 관계가 우선이어야 한다. 여기에 무언가 선존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벗어난, 어떤 계약관계가 되어야 하고, 이해 관계가 되고, 조건과 보상의 관계가 되고 만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꾸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놓치고 살기가 일쑤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 문제에 항상 집착되어 있다. 그리하여 항상 자기 자신을 치게 된다. 온통 자신의 부족을 탓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 보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누리고, 여기서 먼저 평안과 만족과 감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다워야 한다는 문제는 그 다음의 것이다. 이것이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 신앙상의 혼동과 혼란을 낳고 있다. 어떻게 혼란을 낳는가?

조건을 만들고 공로를 만들면, 반드시 '자랑'이, 다시 말해서 '겸손한 교만'(SUBORDINATE PRIDE)이 생긴다: '나는 이렇게 행하였는데, 너는 왜 행하지 않느냐?' 결국은 '정죄'로 몰고 가는 수 밖에는 없게 된다. 그러면 안 된다. 당신이 신앙상의 '열심'을 내는 것은 잘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귀한 것이다. 그것은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랑'으로 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랑' 만큼 곧 '겸손한 교만' 만큼 자신 안에 근거를 세우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 안에 근거를 세우기 시작하면, 상대방에게, '너의 근거는 무엇이며, 너는 그 근거 위에 쌓아 놓은 것은 얼마나 되는냐?'고 묻기 시작한다.

이런 판단 기준은 그 일부분이라도 다음과 같은 우리 한민족의 종교적 심성에서 영향을 받은 사실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1. 혼합적 요소: 한민족의 종교심성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것은 토속신앙인 샤머니즘이다. 이 샤머니즘에는 특별한 교리나 경전이 없다. 그래서 모든 종교를 무리없이 포용한다. 이러한 종교의 심성에 크리스천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열매맺는 과정에서 다분히 혼합적인 요소가 크리스천 신앙 속에 유입될 수 있었다.

    2. 기복적 요소: 한민족의 종교심성에 유별나게 기복심성이 강하다. 다시 말해, 한국인이 종교에 귀의함은 복받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한민족의 문화의 심층을 이루는 것은 무속신앙이요, 이것은 기복신앙을 핵으로 이루고 있다. 이것이 미끼되어 크리스천 신앙인들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3. 신비적 요소: 한민족은 정이 많다. 이 정이 때로는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일 때가 많다. 어떤 종교의 교리나 신앙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원리원칙에 의해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신앙생활도 감정에 치우치기 쉽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신비주의로 흐르게 된다. 여기서 파생되는 투시, 예언, 방언, 축귀, 환상, 치병, 입신 등의 신비능력에 의해 크리스천 신앙인들은 유혹받을 수 있다.

    4. 형식적 요소: 유교는 한민족의 심성에 형식적이고 겉치레적인(외식적인) 요소로 큰 영향을 주었다. 내면 보다는 외형상 허례허식에 더 치중하였다. 그리하여 이중적 행동양식을 보여주는 일이 많다. 이 유교의 영향으로 복고적이고 율법적인 요소도 다분히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한국의 교회는 분열과 분파가 끊이지 않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5. 도피적 요소: 한민족의 종교심성에는 어떤 운명에 맞서 극복하려는 의지보다는 그 운명에 순응하는 경향이 많다. 모든 것을 팔자 소관이나 숙명으로 돌리면서 운명신앙으로 안주하려 한다. 이로 인하여 직면하는 문제를 해결할려는 냉철한 비판정신과 현실 참여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현실 도피를 합리화하는 퇴행적이고 도피적인 심성을 굳혀 간다. 그리하여 우리 주변, 곧 공주 계룡산 일대, 서울 근교의 북한산이나 삼각산 일대에는 이러한 도피적인 형태가 많은 신흥종교를 낳고 있다. 한국 교회 안에는 이러한 부류 속에 있다가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예를(간증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이런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자라난 우리는 신앙상의 '열심'을 내는 것은 바람직하겠지만, 그것을 '자랑' 곧 '겸손한 교만'으로 상대방을 비하하고 싸우는 것은 주님의 '모임' 안에서는 절대로 금물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은혜 아래 있음을 기억해 할 것이고, 내가 깊은 신앙심에 들어가 있는 것은 내 스스로에게 복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심판권도 정죄권도 없다. 그것으로 인하여, 서로 유혹을 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마태복음 23:13>에서 화를 내셨듯이, 우리 모두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의 그 왕국을 닫아버리게 만들고,' 자기들이 불러 모아 놓고는 자기들 보다 더 종교적인 자들을 만들어 내는 악순환을 겪게 되는 것이다. '모임'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임'은 무한히 용서받는 곳이요, 오직 하나님 앞에 서서 은혜를 입는 곳이어야 한다. 이것이 방해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의'로서, 공로나 조건으로서, 혹은 제도나 예배의식으로서 하나님을 붙잡아 놓으려 한다면, 하나님은 '그 모임'을 떠나 버리신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전부이며, 신앙적인 책무와 신앙적인 실행이 요구되는 것이다. 무엇으로서?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감사로서,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인 인간의 가치로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준행하는 신자로서 복받은 삶을 사는 당신이길 기원한다. 샬롬.

 
 

<Created/20080917> <Updated/20080919><2013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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