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중광야대특집][대한민족 3대 암살미해결 사건] <명성태황후 암살단> 주모자[3]ㅡ이사벨라 비숍(Isabella B. Bishop) ㅡ 우리는 과거를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 없으며, 역사로부터 <대영제국>(British Empire)을 '에어브러쉬'로 미채(微彩)할 수는 없다...그렇지만 홍보를 이용해서...우리는 <영국합병법인>(Britannia Inc./범대영제국)이 부활해서 또 다시 온 민족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막아낼 수 있다!!

<명성태황후>는 <영국+미국+일본>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과
<청국+독일+러시아>의 원격지원(묵인/방관??)으로 암살당하셨다??!!

글/ 정재선 목회자

[우선필독자료]
1. <명성태황후 어진과 경술국치 104주년> <
자세히보기>
2. <을미사변> 후에 <명성태황후>는 살아계셨다??!! <
자세히보기>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영국의 밀정'이었다는 필자의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자료인데, 이제서야 공개한다. 이 <영국식 첩보형 모델>이 일제가 한국을 완전 강점한 1910년 이후로부터 1945년에 패망할 때까지 그대로 강하게 적용된다. 특히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사이에서 일제의 <대한국인의 혼>을 강탈해가는 그 과정이 실로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한다. 이른바 일황 <히로히토>의 명령이 하달되자,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민족정신의 중심을 찾아라>는 특별명령을 내린다. 이 명령을 근거로 해서 조직되었으니, 바로 <대한민족의 역사 왜곡 및 말살>을 주도하는 <조선사편수회>인 것이다!! <하단 이미지 참조>. 이는 매우 중대한 <역사적 진실>이기 때문에, 필자는 별도주제 [누가 <대한민족역사>(大桓民族歷史)를 왜곡시켰는가??]를 통해서 필적(筆跡)중에 있다!! 자료들이 워낙 고가(高價)라서...힘에 겨웁기는 하지만...그래도 버텨내고 이겨내서...반드시 <우리 대한민족의 역사 왜곡과 말살의  진실>을 밝혀내고야 말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권력자 주변에는 아직도 이 <역사왜곡>의 교육을 받고 세뇌를 받은 '마지막 잔당들'(뉴라이트/OO법무법인소속설??)이 정부요직들에 차고 들어가고 있지만...그것은 한시적일 뿐...가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또한 지난 10월 4일에 북한의 수뇌 세 명이 깜짝 남한을 방문 다녀갔다는데...우리는 저들의 <짜고치는 팻놀이>(??)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고?? <역사의 주관자> 곧 <HISTORY= HIS+STORY>는 오직 <예호슈아 크리스투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그루터기들>이 아직도 북한 안에 (지하모임으로) 생존하고 있음을(모퉁이돌선교회 참조)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인 것이다!! 필자의 이 외로운 <필적>(筆跡)에 여러분의 아낌없는 관심과 기도를 당부드린다!!
샬롬!! <2014.10.7/깊은밤>


◆[이미지/화중광야제작] <이미지 중앙상단린  1929년에 일제가 강제로 철거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허락받고 찍은 이 <옥호루> 주변(??)을 확인할 수 있을 턴데 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후면에 멀리 <백악산>이 보인다. <일제가 강제로 철거해 버린 옥호루터/자세히보기>.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옥호루' 아니면 '곤녕전' 주변이라는 것이다. 눈이 쌓인 것으로 보아 <1895년 1월 말경>에 촬영한 것이 확실해진다!! <암살> 당할 것을 미리 아셨는가!! 허락해 주시지 말았어야 하는데...너무도 쇠퇴해가는 국운을 일으켜 세우시겠다고...<빅토리아 여왕>에게 청원드리면 대영제국이 조선을 도울 수 있다는 '속임수'(??)에 넘어가 <명성태황후>께서 어안(御顔) 촬영을 허락하신  것이...그만 9개월 후에...이렇게 암살당하시고 만 것이니...이 어찌 을씨년스럽지 않으리요!!

한편, '고요한 나라' 조선에 불기시작한 소위 개신교 교단소속이라는 서양 선교사들이 근본적으로 한국에 들어온 목적이 이런 일 때문이었다?? 그들은 '미개하다'는 조선 땅 안에 복음을 전하였고, 성경을 번역, 발행하였고, 학교를 세웠고, 의료시설을 세웠고...구민사업도 하였고...그런데...그들은 왜 이러한 한 국가의 비극참사에 동참하였을까??...이것을 깨닫고 보니...그 전에 배우고 연구하였던 <한국교회사>는 반드시 다시 정리, 씌여져야 할 것이다!! <2014.9.22>.


그 이유를 뒷받침해주는 이 책을 공개한다:

일반적으로 <이사벨라 비숍> 여사의 대표적인 기행문으로 꼽히는 <KOREA AND HER NEIGHBOURS>(한글번역판=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자세히보기>은 19세기 조선의 풍물, 종교, 기생, 민요, 서민 생활, 궁중의 모습, 여성들의 낮은 지위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좀 더 부연하자면,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1892년에 여자로서는 최초로 <영국왕립지리학협회>(Royal Geographic Society)의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에딘버러에서 정식으로 <유리판 사진술>(촬영/현상/인화)을 습득하였다. 밀정으로서 자격을 갖춘 셈이다. 그리고 1893년에 동아시아를 다시 찾아 왔다. 1897년에 완전히 귀국할 때까지 이 5년간의 기간은 <밀정의 절정기>로서 바쁜 기간이었다.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은 1894년이었고, 약 4년 동안 조선과 중국과 러시아(연해주)를 방문하면서, 그 사이에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를 4차례나 알현하였으며, 제정 러시아의 조선인 이민들도 만났다. 물론 조선 근대역사의 큰 사건인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취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체험은 본서 <KOREA AND HER NEIGHBOURS> 속에 담겨 있는데, 1897년 첫 출간 당시 영국 출판계의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는 것이 통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필자 역시 2009년부터 소실된 <명성태황후어진>을 필적(筆跡)하기 시작할 때에는, 그다지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중에, 그 당시 한국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Walter C. Hillier)가 <KOREA AND HER NEIGHBOURS>에 <서문>을 쓴 것을 접하고부터, 이 자의 배경이 심상치 않음을 확인하다 보니...<이사벨라 비숍>이 한국에서 체류할 수 있도록 여러 조건들을 해결해 준(언더우드 선교사家 합류??) 장본인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필적(筆跡)해 나간 것이다!!

◆[이미지/화중광야제작] 위 이미지를 통해서 세 가지 <역사적 진실>이 서려 있다:

    ①<KOREA AND HER NEIGHBOURS>의 1897년 초판이 영국 국내판과 미국 해외판의 표지 자체가 완전히 다르게 발간되었다는 점이다!!

    ②영국내 첫판에서는 원제목 <KOREA AND HER NEIGHBOURS>는 책등 상단에는 보이지만 원 표지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는 이상한 심볼이 보인다. 특히 <朝鮮>의 <鮮>자가 거꾸러 박혀 있음에 필자는 경악을 금할 길이 었었다. <鮮>이 거꾸로 박힌 것은 <朝鮮>이 엎어져 버렸다, 곧 <명성태황후가 제거되었다>는 <밀정보고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특히 이 <鮮>자가 약자인 것은 한국에서 통용되는 자체가 아니라 일본에서 통용되는 간체이기에, 이 자체(字體)는 일본에서 디자인해서 제공해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필독자료/'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의 어진(御眞)은 반드시 있었음에 틀림없다!!'[4]/자세히보기>.

    ③1900년에 창립된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가 1937년에 발행한 전문지의 표지 위에 1897년에 발행된 <KOREA AND HER NEIGHBOURS>의 영국초판의 표지 심볼(朝鮮과 태극마크)이 동일하다!! 이로써 이 책이 <첩보보고서>였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왕립>을 내세워 가면서 세계 곳곳에다 정보요원들을 심어 놓았으니,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도 그 조직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이 조직의 대표들이 그 당시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선교사들(언더우드/아펜젤러/게일 등)이 대거 등용된 것만 보더라도...저들의 본색 <밀정정체>(??)가 드러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명성태황후>는 <영국+미국+일본>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에 의한 <협력작전>(??)이었음을 얼마든지 추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 진실>이 그렇게 입증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화중광야제작] <왼쪽이미지> 23세 때의 <위안 스카이> 모습이다. 이 모습으로 조선에 입성하였다. 35세인 1894년 <청일전쟁> 발발직전에 청국으로 도피하였으며, 36세인 1895년에 <명성태황후암살> 사건에 <위안 스카이>는 무관하다고 일괄해 온다면, 그것은 크나 큰 올바른 역사적 인식을 유기하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다. <명성태황후암살>에 <위안 스카이>도 깊이 관여되어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필자의 <필적>(筆跡)은 계속 달려나갈 것이다!!

<오른쪽이미지> 선통제(宣統帝/푸이)를 퇴위시키고 자신이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취임하였다. <Putman Weale, The Fight For The Republic In China, New York: Dodd Mead & Co., 1917, p.24)>. 그러나 4년후 1916년에 병으로 사망하자, 이로써 아울러 그 당시 청국의 <위안스카이>(Yuan Shikai/원세개/袁世凱·1859-1916)의 암약(暗躍)을 묵과할 수 없겠다. 1882년에 조선(한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이에 조선이 친청(親淸) 세력인 <명성태황후>의 주도하에 청나라에 구원 요청하였다. 이에 두 차례나 과거시험에 실패한 <위안 스카이>는 경군통령(慶軍統領)인 <우창칭>(Wú Chángqìng /吳長慶/吳豚師: 청나라 廣東의 水師提督)의 막하에 들어가 23세의 젊은 나이에<위 이미지 왼쪽> 그를 따라 조선에 들어와 <임오군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후 조선에 머물면서 조선 궁정의 내정에 깊이 관여했으며, 1884년에는 <이홍장>(李鴻章)의 명으로 <조선주재공사>(외교수장이 아니라 외교를 담당하던 북양대신의 파견원의 신분)가 되어 청나라를 대변하고 일본에 대항하였다. 1895년 <청일전쟁 > 발발 직전 도주, 귀국하여, 이후 청나라 군대의 신식군대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西元1882年(光緖8年), 韓國李朝訓練軍叛亂, 持兵器侵入禁廷, 焚日本公使館, 王妃失踪, 吳長慶奉命率師六營進駐漢城, 協助朝鮮政府擊潰亂黨迎復王妃遂亂平. 吳長慶將軍對當時朝鮮內亂的平定, 貢獻至鉅.> 이 역시 시간이 허락하면, 밝혀내야 할 주제임에 분명하다 하겠다!! 샬롬!! <2014.9.25><2014.9.30/보정하다>.


세계를 제패하는데 있어서 각 지역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겉으로는 <왕립>(Royal)을 내세워 가면서 각종 비밀조직단체를 세계 곳곳마다 세워두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문화, 교육, 계몽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타국 정복(정렴)용 <정보수집>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사실은, 근대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 국내로 입국한 후로 <한글성경번역>에 올인하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부지런히 <한국에 관한 역사/지리/전통/문화/신화/야사>를 번역 출간해서 책으로든지 아니면 원고 자체를 자국(영국/독일/프랑스)으로 보낸 것이다. 그 자료들을 살펴보니, <THE KOREA MISSION FIELD>라든지 <THE KOREA REVIEW>라든지 <THE KOREAN REPOSITORY> 등이 발간된 것이었고, 이 자료들의 본래의 의도는 <한국정보수집>이었음을 이제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Fight
여기서 잠시 영국 쪽으로 필을 돌린다: '카도쉬'(성도) <바돌로매>(St. Bartholomew)는 히브리원어로 기록된 <마태오복음서>를 파지(把持)하고 있었다. 이로써 <마태오복음서>가 주후 70년에 예루살라임이 멸망 한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회의론자들을 반박하게 된 것이다. 만일 지금 우리가 히브리원어로 기록된 이 <마태오복음서>를 파지(把持)하고 있다면, <그 메시야>의 <그 진짜 이름>에 관한 논쟁은 영원히 끝나 버리고 말 것인데....말이다!!

또 다른 전통에 의하면, '종도'(從徒) <토마스>(Apostle Thomas)가 인도에서 히브리원어로 기록된 <마태오복음서>로 전도하였다고 하는데,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는 <토마스>가 '파르티안人들'  (Parthians/페르시야제국)에게 전도하였다고 말한다.

한편, '셰익스피어'(Shakespeare/필명이지 실존인물 아님) 이름의 실체가 'Speare-Shake'(스피어-셰이크)이며, 이것을 바꾸어 놓으면 'Shake-Spear'(셰이크-스피어) 곧 '창을 흔들다'('사냥하다/살육하다' 비유)라고 하는 여신 '미네르바'의 본성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놀라운 비밀이 있는 것이다!! 이 '스피어 세이커'  <엘리자배스 1세> 여왕의 42년 통치가 끝난 후에, 영국 <브리태니아>(Britannia)는 <영국합병법인>(Britannia Inc.) 내지 예수회와 바빌론출신의 '유태인들'이 운영하는 하나의 <다민족회사>(Multinational Corporation)로 바뀌어 버렸다. 따라서, 그 당시 여왕은 너무 늙었고 노망하였다 하니 이에 대하여 책망까지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1600년에 영국 <브리태니아>(Britannia)는 <영국합병법인>(Britannia Inc.)으로 바뀌는데, 이 때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동인도회사>(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 설립을 칙허(勅許)해주었던 것이다!!

이 회사가 바로 <허드슨베이회사>(Hudson's Bay Company/HBC)의 전신이다. <허드슨베이회사>는 역사적으로 북미(특히 현재 캐나다)의 비버 등의 모피 교역을 위해 1670년 5월에 설립되었던 잉글랜드의 칙허 회사이자 국책 회사 이며, 현재는 캐나다 최대의 소매업을 중심으로 하는 기업이다. 현존하는 북미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라고 전한다.

1601년에 <제임스 랭캐스터 卿>(Sir James Lancaster)이 <영국동인도회사旗>를 달고서 인도로 첫 항해를 하였으니, 이 때 그가 운항한 배의 이름이 <붉은용>(赤龍/Red Dragon)이었다.

이 때부터 영국의 아시아(인도/동남아시아/동북아시아)의 약탈 및 점령의 도화선이 설치된 것이다!! 그리고는 1613년에는 <제임스 1세> 왕이 일본의 실권자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선린우호관계를 제의하는 친서(親書)을 보냈으니, 이 때를 기점으로 해서 영국은  극동지역에로의 마수의 손을 뻗쳐가면서, 우선적으로 일본을 장악한 후에 조선점령을 모색했던 것이었음을 그 동안 감추어져 있던 <역사적 진실>을 증명해주는 이런 자료들이 밝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미지/Wiki제공] 영국왕 '제임스 1세'가 1613년 그 시대 일본의 실권자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보낸 친서(親書)이다. 현재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위 본문 중 일부이다:

'Even in our country we have heard with certainty of the greatness of the glory of the Lord Shogun of Japan...Thus for ever and ever we will, we avow, communicate with Japan without any sense of distinction or separation'

'우리 나라에서까지도 우리는 일본의 쇼군에 대한 영광의 위대함의 확실성을 들어왔습니다...따라서 영원히 이 자리에서 우리는 구별 혹은 분리라는 아무런 의미없이 일본과 소통하겠습니다.'

위 친서는 항해사 <존 새리스>가 가지고 왔으며, 당시 일본 최고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사(고문/척사)였던 영국인 <윌리암 애덤스/일본명:>에 의해서 번역 읽혀졌다. <하단 이미지 참조>.

다음은 <제임스 1세>의 친서에 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답신이다:

'Though separated by ten thousand leagues of clouds and waves, our territories are as it were close to each other'

'비록 수 십만의 구름들과 파도들로 분리되어 있을지라도, 우리의 영토들은 서로 가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13년 10월 1일에 <제임스 왕>에게 보낸 답신의 한 부분이다.


1600년에 <윌리암 애담스>(William Adams)의 도착과 <이에야스>와의 군사(자문) 관계로 인하여, 두 사람 간의 토론의 주제는 자연히 유럽 공동체의 정치문제였다. 애담스가 이에야스의 은덕을 입은 것은, 그의 남다른 견해와 일본 통치자에게 자원해서 보여주는 태도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미지/화중광야제작] ①<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희귀 초상화이다. <John Saris, Ed. by Sir Ernest M. Satow, The Voyage of Captain John Saris To Japan, 1613, p.Titlepage>. ②네델란드배로 일본에 도착해서 이에야스에게 배 두 척을 만들어 준 대가로 그의 군사(척사)가 된 <윌리암 애덤스>가 <존 새리스>를 통하여 가져 온 <제임스 1세>의 친서를 <이에야스> 앞에서 번역, 읽어주고 있다.  ③<존새리스>의 이미지는 입수가 불가능하여, 그의 친필서명 만이 전해 오고 있다. <The Voyage of Captain John Saris To Japan, 1613, p.lxxxvii>.


<존 새리스>(John Saris)가 <영국 동인도회사>(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를 위한 일본과의 무역협정 협상을 들고 나왔을 때, <이에야스>는 누가 <새리스>에게 서신을 보냈는지 이미 알고 있던터라, 두 지도자 곧 <제임스 1세>와 <이에야스>는 두 사람 간의 문서와 선물울 전하는 특사들을 통해서 보내 온 서신들로 사적 관계를 이루어가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낸 서신(친서) 이외도, 영국과 일본 두 나라에 존재하는 관심사들도 이 정치과정에서 주고 받았다. <이에야스>는 갑옷을 선물하도 하였으며, <제임스 1세>는 스페인과 정치적 교환이 진행되던 1581년에 스페인에서 제조된 시계 한 개를 <이에야스>에게 보내왔다. 이러한 관심사들이 무역의 세계화에 주요한 실례를 입증하는 증거로서, 오늘날에도 양국 간에 변화를 지속하는 하나의 초석이 된 것이다.

[맺으면서] 1894-1897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서 한국 밀정활동을 마치고, 1897년에 영국으로 완전 귀국한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그 동안 해외(특히 일본)에서 본국 출판사 대표 <존 머레이>(John Murray)에게 보낸 편지글들을 통해서 한국의 상황을 상술해서 보냈던 것이다. 그 편지들 만이라도(일부 복사본 만이라도) 입수할려면, 영국을 다녀오는 수밖에 달리 다른 방도가 없다. 현재로서는...항상 느끼는 것이지만...필자에게 충분한 공간과 충분한 자료가 주어진다면...이 보다 더 심도있게 필적(筆跡)해 나갈 수 있을턴데...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자족'(自足)을 체험한 바대로...이 현실을...이 순간을 소중하게 <알로하>에게 드리는 것이다...기도해주신 <화중광야가족>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샬롬!!

2014년 9월 30일, 갑자기 일교차가 변덕을 부린다...조용히 지나가지 못한 하루였다!! 홍도유람선사고, 대전타이어공장 화재, 종이박스공장화재...혹여 내일 10월은 조용해질려나...<2014.9.30/9월 마지막을 보내면서>

 

 

<Created/20140921> <Updated/20140930><20141001><20141003><2014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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