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선의 마무리 성경번역] [주제-22] <요안계시록 4:3> ㅡ A Rayne Bowe Not A Rainbow!! ㅡ '한 무지개'가 아니라 '한 우기'(雨器)이다!! [7]

'한 무지개'(A Rainbow)가 아니라 '비(雨)를 담는 한 그릇'(A Rayne Bowe)이니, 이는 '말씀을 담는 한 그릇'으로 풀이된다!! [7]


[제6부에서 계속] <'한 무지개'가 아니라 '한 우기'(雨器)이다!! [6]/자세히보기>

앞글에서 언급하였듯이, 본 주제 '비(雨)를 담는 한 그릇' 곧 <우기>(雨器)는 <불교자료>에서 풀릴 가능성을 내다보고서 그 귀하고 고가인 자료들을 우리 <화중광야 가족의 도움으로> 입수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에 앞서서 독자 여러분의 '이해가 어렵다'(??) 판단되어서 다음의 주제가 떠오른 것이다!! 이것은 본절의 의미를 보다 더 포괄적이고 쉽게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가이드라인 측면에서 다루고자 한 것이다. 그 주제는 바로 <물>이다!!

'같은 물을 마셔도 소에게는 젖이 되고 뱀에게는 독이 된다!!' ㅡ <법구경>(法句經)

초기 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법구경>은 다른 경전들처럼 일정한 시기와 장소에서 행해진 말씀이 아니라 여러 시기와 장소에서 게송(偈頌)의 형태로 행해진 가르침을 주제별로 엮은 일종의 '불교 잠언시집'으로 교리나 계율의 문제가 아닌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에 대해 깊은 이해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삶의 지혜를 제시해주는 대표적인 동서고금의 잠언집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같은 물을 마셔도 소에게는 젖이 되고 뱀에게는 독이 된다!!' (불교의 우화)

같은 물을 마셔도 소와 뱀은 다른 결과를 내놓는다. 같은 물을 마셔도 소가 마시면 젖이 나오고, 뱀이 마시면 독이 나온다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같은 물>이라하면 <불조성현>(佛祖聖賢=진리파지자)의 말씀을 이름하고, <소와 뱀>은 말씀을 듣는 사람을 비유하는 것이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어떤이는 '불조성현'의 말씀하신 뜻과 같이 스스로를 크게 도와 크게 쓸 줄 알고. 어떤이는 '금과옥조'와 같은 성현의 말씀을 그릇되이 왜곡 조작 비방하는데 혈안이 되어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위해(爲害)를 가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말씀은 '같은 물을 마셔도 소는 젖을 내지만 뱀은 독을 낸다'는 뜻이다. 젖을 내는 소가 될지 아니면 독을 내는 뱀이 될지는 자신의 '선택적의지'에 달려 있음이요, 똑같은 환경에서도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냐에 따라서 인생이 좌우된다는 말씀이다.

성경기록들 속에서도 이와 같은 비유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그 뜻 - 불레마와 딜레마/별도주제 작업중>

모든 진실과 선악은 결과(結果)에서 드러난다.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우리는 비로소 그 나무의 정체와 가치를 알 수 있다. 같은 물을 마셔도 소는 우유를 내고, 독사는 독을 품는다. 그러므로 <젖과 독>이라는 결과야말로 <소와 독사를 가름하는 분명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물'(Water)은 흐르면서 역사한다!!....'물'은 '예호바의 입'이다!!

<빗물>(雨)을 담는 그릇을 <대접>이라고 칭한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비>를 내림의 양을 측정해서 백성들의 농사일에 큰 보탬이 되도록  하는 정책을 펼쳤다고 전한다. 이른바 <측우기>(測雨器)의 발명이 바로 그것이다. 앞장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바 있다. 본장에서는 약간 특이한 주제로 정해 본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도 우리 농사에 잇어 <벼>는 가장 중요한 작물이었다. 그러나 <물>을 필요로하는 벼농사에서 가뭄으로으로 인한 흉작이 왕조의 큰 걱정거리였다. 벼농사를 순조롭게 짓기 위해서는 농사 제철에 <물>이 했지만, 관개시설(灌漑施設/물대기))이 빈약했던 시대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雨)가 용수(用水)의 주원천(主源泉)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동아시아권에서 몬순지역의 농업국가인 우리 땅에서 <봄가뭄>은 우리 땅에서 피하지 못할 숙명이었다. 그 시대에는 오늘날 같이 <어둠의 세력들>이 '기후 가지고 장난질'(Weather-Engineering)칠 수도 없었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따라서 고대(예: 부여국)에 있어 기후의 불안정, 특히 가뭄은 임금의 책임이었다. '강우와 가뭄이 순조롭지 않아 오곡이 제대로 익지 않으면'(水旱不調, 五穀不熟) 그 죄를 물어 왕을 바꾸거나 죽여야 할 정도로'(舊夫餘俗 水旱不調 五穀不熟 輒歸咎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인용/三國志 魏書 東夷傳 '序文,夫餘條'), 한발(극심한 가뭄)은 곧 왕권교체로까지 연결되던 최대의 정치쟁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이 손수 나서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수 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백성을 아끼는 왕의 정치구도상 최대의 걸림돌인 <강수>(降水)를 예측, 조정할 수 있는 기기인 <측우기>(測雨器)를 창시하신 분이 바로 세종대왕이셨다.

과연 측우기는 우리 조상들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어느날 세종대왕이 장영실을 불러 명하였습니다. '요즘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데 어려움이 많구나. 그대가 내리는 비의 시기와 그 양을 매년 조사할 수 있다면, 우리 백성들이 미리 가뭄에 대비할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대가 한번 비의 양을 잴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보라.' 임금의 명을 받은 장영실은 그날부터 오직 비의 양을 재는 물건을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였습니다. 결국 1441년 장영실은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발명하였습니다. 이로써 농부들은 보다 편리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역사는 이미 필자도 학교에서 배웠지만, 정설로 되어 있었 온 내용이다. 그런데 '측우기'는 세종이 아니라 세종의 세자인 <문종>(1414-1452)이라는 것이다:

    근래 세자가 가뭄을 걱정하여 비가 올 때마다 비가 그친 후 땅을 파서 깊이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정확한 깊이를 알 수 없어 구리로 된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그 그릇에 고인 빗물을 재어 보았다.


문종은 '흙비'(土雨, 黃雨)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궁중에 구리로 된 기구를 두어 빗물을 받아서는 그 양을 재어보고, 흙비가 아니라 송화(松花) 가루 때문에 빗물이 붉은 것이라고 밝혀 내는 등 기상관측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로서 측우기의 창안자는 세종이 아니라 문종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측우기> 제작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이 명기된 기록이 있다.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지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여러 과학기기를 제작한 설명과정에서 세종 24년(1442년)에 측우기를 만들었는데, <이순지>(李純之/1406-1465)가 주관하였다고 명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순지>는 지방에 보낼 여러 개의 측우기를 만드는 업무를 맡은 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조실록> 속에 <측우기>가 '모년 모월 모일...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확증해주는 기록이 없는 한, 현재로서는 '측우기'의 발명의 아이디어는 <세종>이 냈고...'개발을 주도한 자는 <문종>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다는 것이다. (이하상, '기후에 대한 조선의 도전, 측우기.' 소와당, 2012, p.211-224 참조).

◆[이미지/화중광야제작] <왼쪽이미지> 개간한 철원평야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다. (손경석, 이상규, '사진으로보는 근대한국(하)', 서문당, 1987, p.114). <오른쪽이미지> 일본 기상학자 '와다 유우지'가 인천측후소로 옮겨진 경상감영(대구)에 있던 <선화당측우기=영영측우기>를 찍은 것이다. (이하상, '기후에 대한 조선의 도전, 측우기.' 소와당, 2012, p..227). 1904년부터 인천(仁川)에서 활동을 시작한 임시관측소가 1908년 4월 1일부터는 농상공부관측소(農商工部觀測所)로 변했다가, 1910년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관측소(朝鮮總督府觀測所)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 1917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일본인 <와다 유우지>(和田雄治)의 <조선고대관측기록조사보고>(朝鮮古代觀測記錄調査報告)의 제1장 <세종영조양조-측우기>(世宗英祖兩朝-測雨器>(하단 이미지 참조)에서 <측우기>의 발명 및 제조 및 용도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서운관제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새 왕조의 문무백관 관제를 새로이 정하였는데, 이때 서운관의 직제와 관원의 품계도 정하였다. 태조 1년 새로이 제정된 서운관제는 세종 시대에 이르러 여러 차례의 확충과 정비를 거쳐 세조 12년에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관상감(觀象監)'으로 바뀌었고, 이러한 제도는 성종 시대 완성된『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특이할만한 것은 태종때부터 영의정이 서운관의 총 책임자를 맡고 있음이 실록에 나온다. 영의정이 의정부의 최고 책임자라는 본연의 직책 외에 별도로 정3품 아문의 최고 책임자를 겸임한 것은 불과 총32개의 정3품 아문중에서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세자시강원·관상감의  6개 아문(부서)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역대 조선왕조에서 천문분야의 정치·사회적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연산군은 재위 12년(1506) 관상감을 혁파하여 '사력서'(司曆署)로 격하시켰다. 중종 재위 후에 관상감 관원에 관한 기록이 다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중종 즉위 초에 관상감으로 복구한 것 같다. 관상감은 고종 31년(1894)년의 갑오개혁 때 '관상국'(觀象局)으로 바뀔 때까지 존속하였다. 일제 식민하의 치욕은 천문제도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1910년에서 1945년 사이에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산하의 '관측소'(觀測所)로 명맥을 유우지하였다.


그리고 <와다 유우지>(和田雄治)의 <조선고대관측기록조사보고>(朝鮮古代觀測記錄調査報告)에는 <조선고대관측기록조사보고서: 조선의기상>(朝鮮古代觀測記録調査報告書: 朝鮮の氣象)을 저술한 <히라타 토쿠타로우>(平田德太郞)이 쓴 서언이 있는데, 이 서언에는 <히라타>가 당시의 관측소장이었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인 천문관원은 없었음이 기록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우리 민족이 우리의 눈으로 하늘을 볼 권리를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치욕적인 사건이다.

◆[이미지/화중광야제작] <왼쪽이미지> <와다 유우지>가 1915년에 와병으로 귀국한 후에 1917년에 <조선총둑부관측소>가 발행한 그의 저서 <조선고대관측기록조사보고>이다. (朝鮮總督府觀測所, '朝鮮古代觀測記錄調査報告', 1917/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중앙이미지上> 1918년 1월 5일 <와다>가 죽은 후, <故理學博士和田雄治君略傳>에 실린 그의 생전의 사진이다. (服部宇之吉, '故理學博士和田雄治君略傳', 學士會月報, 第360號, 1918.2.20). <중앙이미지下> [朝鮮古書の計画的略奪] 朝鮮古書の計画的略奪は、伊藤博文が初代統監に就任してから本格化している。統監府がまず狙ったのは、景福宮内の李王家書庫に代々受け継がれてきた、貴重な古典籍類である。日帝は、埃にまみれ、湿気にさらされている蔵書を「保存し、整理分類」するとの口実で、古書類を引きずり出し、統監府設置3年後の1908年には、各分野の学者を本国から招集し、本の品定めを行わせた。そればかりではなく、統監府の行政部門に「臨時取調局」を新たに設け、朝鮮全土の書籍目録作りに取りかかった。朝鮮総督寺内正毅もしかりである。(예미마정/번역중...). '和田雄治のもうひとつの顔'(와다 요우지의 또 다른 얼굴) (朝鮮新報/2008.6.20 발행). <오른쪽이미지> '기상계의 은인 와다 흉상 18일 제막식 거행' (매일신보/1931.10.10 발행).


'역사는 죽어서 말한다!! ㅡ 도공(陶工)ㅡ토기장이'


한편, 하늘에서 내린 빗물을 담아두는 그릇으로는 <측우기> 이외도 이미 앞글들에서 밝혔듯이 <질그릇/대접> 등이란 것이 있다. 필자는 편의상 이 <질그릇>을 <옹기>(甕器) 혹은 <토기>(土器)라고 연관시켜 오고 있다. 이 토기는 우리 '대한민족'(大桓民族)의 선조들의 일상생활과는 끊을 수 없는 긴밀한 접촉성을 지니고 있다. 지금도 이 한반도 땅에는 <토기>가 발굴되고 있으며, 발굴된 이 토기를 통해서 옛 조상들의 생활양식을 추론해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옛 선조들은 일찍이 흙으로 빚어 만든 그릇에 익숙하였다.

토기를 굽는 자를 <토기장이> 혹은 <도공>(陶工)이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 역사 속에는 이 <도공>에 관하여 한 가지 슬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 이야기의 발원지는 이 한반도가 아니다. 바로 이웃 나라 일본에서 발원되었다고 전한다. 조선 중엽 왜놈의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나고, 1597년에 다시 침략해 온 재침략인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남원과 전주를 점령하였으나, 1598년에 한반도 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물러가 버린 사건이다.

다음 글 <제8부>에서는 본문 중심의 '물을 담는 그릇'(雨器) 곧 <옹기/토기>를 중심으로 해서 계속 <물>(雨)에 관해서 다룰 것이다!!



<Created/20140308> <Updated/201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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