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다...아무리 힘들어도 엘로힘의 <그 말씀>을 읽기를 게을리하지 말자!! 배우지 않는 사람은 금수와 같고, 성경말씀을 담지 않은 사람은 곧 옛뱀의 사기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본문중에서>


사기 당한 <아담>의 집

글/ 안연숙

 

담보로 집을 잡아 경매에 넘겨져서 알거지가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더 억울한 사람들이 있지요. 다른 사람의 보증을 서 주어서 결국에는 자신의 집을 잃는 그런 일을 겪은 사람들 말입니다.

여기 아직 우리 후손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우리의 조상 <아담>이 당한 사기를 말하려 합니다. 엘로힘이 5일간 온 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담, 즉 인간의 집을 마련하신 후 제6일 되는 날에 <아담>을 창조하셨고, 그 속에 성숨님(호흡/바람)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리고 보셨더니 너무 아름답고 좋아서 제7일에는 엘로힘께서 안식하셨다 하십니다. 그 완성된 작품을 시기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 자(者)가 있었으니, 이는 자신이 스스로 빛나는 자라고 생각하는 사탄, 루시퍼입니다. 자신이 내는 빛의 원래는 누구로 부터인지 망각하고 스스로 빛나는 별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본래 엘로힘을 찬양하던 천사장이었으며, 천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엘로힘께로부터 지음받은 피조물입니다. 오히려 엘로힘의 일과 사람을 돕기위해 엘로힘께서 만드신...오히려 사람을 위해서 미리 창조된 이 창조세계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 천사가 타락하여 엘로힘을 대적하였으니, 그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엘로힘의 군대에게 밀려 땅으로 '떨어졌습니다'(편집자주/여기에서 '떨어져 나가다'(히브리어 '나팔' 어의에 의해 '네필림'('복음으로부터 멀어진 자'가 태동/창세기 6:4 참조). 그리고는 지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뱀에게 잠입하여, 아담의 아내를 꼬드겨서 사기를 쳤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선과 악의 그 지식의 그 나무의 것을 먹게 해 줄테니 니들이 가지고 있는 이 집(세상) 열쇠를 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내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엘로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과 악의 그 지식의 그 나무의 것', 그 말씀을 어기어 엘로힘을 떠나라는 말이며, 즉 자신과 같이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자, 자신이 악이면서도 스스로 선으로 단정짓는 그런 곳에 서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선과 악을 분별할 필요도 없었으며 엘로힘 한분만 선하였기에 굳이 따로 선과 악을 나누는 따위의 일을 하는 것은 필요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것이 필요해 지는 것은 엘로힘과 떨어진 자신이 악하지 않다라는 자신만의 선이 필요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선과 악이 인간 역사상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를 자국의 이익을 위해 짓밟는 행위가 선한 것이 될 수 있는, 이 이기적인 선의 가치는 무엇이겠습니까? 수단을 위한 선이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지극히 평범하게 통용되고 있는 가치입니다.

민주주의에서 외치는 선은 다수에게는 선하고 소수에게는 악한 법입니다. 그 다수는 힘있는 사람들일 것이고, 소수는 결국 많은 사람들일지라도 힘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공산주의에서 외치는 선도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선일 뿐입니다.

우리는 악을 선하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집, 이 우주만물의 열쇠를 빼앗긴 채, 노예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까?? 하루의 한끼의 식사를 위해서, 자신의 노후를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위해서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외의 것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빡빡한 생활 속에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엄청난 속도와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우리는 비명도 한번도 지르지 못한채, 마치 우리 안에 있는 소와 돼지처럼 틀에 매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이득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한달, 한달 돌아오는 결제할 것들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릴 뿐입니다.

다시 '선과 악의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의 아담과 하와에게로 가 보겠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자신들이 부끄러워 졌습니다. 엘로힘이 만들어주신 그 모습 그대로가 부끄러워 스스로의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리웠습니다. 부끄럽다는 것은 무엇이지요?? 엘로힘이 만들어 놓은 상태가 부끄럽다는 것은 엘로힘이 선하시지 못하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엘로힘이 만드시고 '그렇게 놔두신 상태가 부끄럽고 불만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엘로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선하신 엘로힘을 경계하는 그들의 행동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사기에 대한 내용은 전혀 인식하지도 못한 채, 몽롱한 채로 자신들을 부끄러워하고...아담은 엘로힘이 주신 자신의 아내를 탓하고 미워하고 결국 사탄이 잠입한 뱀을 미워하고 탓하기 이릅니다. 결국은 자신들은 선한데 다른 게 악하다라는 뜻입니다. 자신들의 죄가 없고 자신들은 선하며, 사실은 그 죄를 묻는 엘로힘을 악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악한 공기가 가득하여 친히 엘로힘께서 공기 정화를 위해 바람을 일으키시며 걸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날의 바람을 위하여 그 정원 안을 거니시는 주 엘로힘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리하여 아담과 그의 아내가 주 엘로힘의 얼굴로부터 그 동산의 나무들 한 가운데에 숨었다. (창세기 3:8, 킹제임스 정재선역)


'아담아!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무슨 문제가 생겼니??' 하시며 허둥지둥 달려오시는 엘로힘 그 아버지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를 아들인 아담은 오히려 무서워하고 경계합니다. '내가 네 아버지야. 아담아 왜그러니??'

<아담>의 반응은 대략 이렇습니다:

    제가 엘로힘을 제 아버지로 생각했는데, 이젠 좀 의심스럽네요. 엘로힘은 제게 무서운 분이 되셨어요. 다가가기 좀 어렵네요. 어떤 것이 진짜 선한거죠?? 어떤 것이 진짜 맞는거죠?? 저를 왜 이렇게 부끄럽게 벗겨놓으셨나요?? (창세기 3:10-11 참조)


자신의 참 권리를 엘로힘이 만드신 그 선한 모습을 부끄러워하게 된 아담은 자신을 위해 만들어 놓으신 세상도 함께 부끄러운 지경에 놓이게 합니다. 가시와 엉겅퀴로 아담을 찌르게 되었으며, 아담이 엘로힘이 원래 만들어 놓으신 선한 것을 의심하고 부끄러워 하였으니, 스스로 땀을 흘려 노력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죄악의 어둠, 그 밤에 엘로힘께서 아담을 구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구원하시는 엘로힘의 손길에 거센 저항을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졸개 뱀에게 사기를 당하고 그 술수에 말려 엘로힘을 선하지 않으신 분으로 의심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엘로힘 앞에서 자신을 숨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믿을 이는 자신 뿐이 없게 된 것입니다. 즉, 스스로 자신만이 선하게 된 것입니다. 엘로힘의 내미는 구원과 도움의 손길에는 냉랭한 반응으로 일관합나다.

결국 엘로힘은 아담을 그 지경으로 만든 그 사탄의 졸개, 뱀을 저주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씨와 그 여자의 씨 사이에 증오를 놓을 것이니, 곧 그 여자의 씨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지라." 하셨다. (창세기 3:15, 킹제임스 정재선역)


곧, 그 여자의 씨와 뱀의 후손과의 끝나지 않을 싸움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뱀의 후손은 간교하여 카멜레온과 같으니 우리는 그들을 분별할 수도 없으며, 우리의 힘으로는 싸워서 이길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뱀에게 다 잡혀먹혀야만 하는가요??

여기서 유독 옛 고전에서는 괴물과 싸움에서 승리한 전사들의 모험담이 나오고, 무서운 괴물에게 바치는 인신제가 고대동화에서 나오는 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편집자주/영국의 전설 '베오울프' 등 참조). 그 옛 뱀은 그렇게 예전에는 스스로를 숨기고 사람들을 유린하였지만, 이제는 눈으로는 안보이게, 즉 분별할 수 없게 우리들을 파고듭니다. 즉, 우리들을 다 옛 뱀의 속성에 묶어두려는 것입니다.

<예호슈아>님께서 <신언약>에서 알기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알곡과 거라지>로 말입니다. 선한 농부의 밭에 시기하는 자가 와서 밤새 거라지를 뿌리고 갔으나 그 농부는 알곡까지 다칠까봐 추수때까지 '거라지'도 함께 자라게 놔두라고 일꾼들에게 분부합니다. 그 일꾼들은 엘로힘의 천사들이며, 그 천사들은 엘로힘의 심판을 행할 엘로힘 밭의 일꾼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에 거라지인 옛 뱀을 숙청을 할 천사들이 봤을 때, 그 옛 뱀의 무리에 끼어있는 오염된 알곡을 발견했을 때, 그 알곡으로 인하여 그 옛 뱀을 처단하지 못하게 생겼을 때, '그 천사가 긍휼을 베풀겠는가??' 생각을 해 봅니다. 그 천사는 오로지 그 옛 뱀, 거라지를 처단하여야 하기 때문에, 거라지와 한 몸이 되어버린 알곡은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게 거라지인지 알곡인지도 분간 못하게 되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오로지 알곡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킨 알곡만이 마지막 추수때에 일꾼에 의해 들림받을 것이니, 그것들은 농부이신 원 주인 엘로힘께 드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엘로힘이 받으시는 산제사이며, 엘로힘의 십일조인 엘로힘의 것인 것입니다. 엘로힘은 땅에서 난 그 어떤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엘로힘의 그 창조물 곧 <아담>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알곡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거라지와 섞이지 않을 수 있는가요??

<창세기 3:15>에 나오는 <그 여자의 씨>의 편에 서는 것 밖에 없습니다. 초록은 동색이라하지 않던가요?? 끼리끼리 모인다라는 말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편 네편 가르는 것은 단지 어렸을 적 장난이 아닌, 영존하는 생명을 위한 선택인 것입니다. 그 여자의 씨는 누구이신가요??

<미리암>의 그 태에서 성숨님(호흡/바람)의 감동하심으로 나신(오신) <그 예호슈아>님이 아니신가요?

첫 번째 아담을 구하러 오신 두 번째 아담이신 것이다.

<그 말씀>이 육을 입고 오셨으니, 엘로힘이 자신의 것인 <십일조>, 그 아담을 구하러 친히 <아담>의 모습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그 옛뱀에게 사기당하여 진 목숨의 빚을 갚으십니다. 이 세상을 관리하는 모든 청지기적인 열쇠를 도난당하였으니, 아담 그의 목숨도 한낱 종이짝에 지날 수 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예호슈아님이 그 처음 아담에게 말씀하십니다 (요안복음 19:30 참조):

    다 이루어졌도다. (It is finished.)
    내가 다 갚았어. 아담. 이제 걱정하지 말거라. 다시 엘로힘께로 갈 수 있어.
    나와 함께 눈물 없는 밝은 곳에서 영원히 살자꾸나...



그렇다면 그 예호슈아님의 품에 어떻게 안길 수 있다는 것인가요?? 그것은 <솔로몬의 아가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가서>는 예호슈아님과 그분의 신부인 '모임/회중'(십일조) 간의 사랑의 대서사시이다. 특히 술람미 여자의 약혼자인 목자에 대한 애절한 사랑은(육체는 솔로몬의 격리 조치로 떨어져 있지만, 혼이 그를 만나는 그 애절함은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의 심금을 귀뚫기에 넘치고 넘쳐 흘렀다. 그녀의 변함없는 마음은 광야 안에서 그토록 솔로몬 왕의 애원(아첨)에도 끝까지 '한 문'(아가서 8:9 'a door'=원뜻은 이 남자 저 남자를 받아주는 창녀같은 행위로서 비진리를 진리로 착각하는 영적 혼합성)이 되지 아니하고. '한 성벽'(a wall=말씀, 진리를 변질시키지 않는 '초지일관'(初志一貫)하는 정숙한 모습=오직 예호슈아님의 한 길만을 지향하는 크리스투인)  떳떳하게 '사랑받는 자'(목자)에게 의지하면서 귀향하는 장면은 참으로 극적이 아닐 수 없다. (<아가서> 강해를 마치면서 그 은혜가 넘침을 글로 옮기다/2000년 7월/정재선)


그 목자(예호슈아)님의 정혼녀로서 자신의 지조를 일국의 국왕인 솔로몬에게 잃지 않으며, 자신을 성벽같이 굳건하게 지켜서 저녁 황혼을 보며, 그 목자의 어깨에 기대어 귀향하는 그 모습 말입니다.

이제는 우리 아담의 후손이 귀향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이니, 우리가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고, 사람이 배우지 못하면 옛말에 '금수'와 다름이 없다 하였습니다. 알곡으로서 들림받기 위해 항상 우리를 정결케 하여야 할 것입니다. 옛 절간에서 왜 수행을 할 때, 노동을 하며 마음을 비우고 고되게 하였겠는가요??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 두 가지 상반된 가치관 <선과 악>의 대조를 분별할 수 있도록 설법해 놓으신 붓다(佛陀)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를 <법구경>(法句經) 혹은 <법구비유경>(法句比喩經)이라고 일컬습니다:

    마음은 모든 법의 근본이 되어 마음이 주인이 되고 마음이 지배한다. 나쁜 생각을 마음에 품은 채 말하고 행동하면 재앙과 고통이 그가 지은대로 좇아온다. 수레가 삐걱이며 바퀴자국을 쫓아가듯이 ㅡ 心爲法本 心尊心使. 中心念惡 卽言卽行.罪苦自追 車轢於轍 (법구경, '쌍요품 1장')

    마음은 모든 법의 근본이 되어 마음이 주인이 되고 마음이 지배한다. 좋은 생각을 마음에 품은 채 말하고 행동하면 복과 즐거움이 그가 지은대로 좇아온다. 그림자가 물체를 쫓아가듯이 ㅡ 心爲法本 心尊心使 中心念善 卽言卽行 福樂自追 如影隨形 (법구경, '쌍요품 2장') <법구 엮음, 한명숙 옮김, '법구경', 홍익출판사, 2011, p.44-45>.


위 법문(法文)은 <법구경>에 나오는 제1품인 <쌍요품>(雙要品)의 말씀입니다. 본품은 한 가지 사물을 놓고서 두 대립되는 대상을 통해서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보여줌으로써, '원융과 조화'를 이룬다는 불가(佛家)의 가르침의 진수입니다.

오늘날같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빡빡한 생활 속에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살아가면서 영적인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엄청난 속도와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비명도 한번도 지르지 못한채, 마치 우리 안에 있는 소와 돼지처럼 틀에 매여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짬을 내어서 읽어볼 만하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이는 반세기 전에 기독교계에서 일부 배타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을 타고 들어 온 미국의 복음주의에 편승해 있는 <획일주의> 곧 <내가 믿는 종교 외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그리하여 살인과 살생을 미화시키는 '지상 유토피아 광독(狂毒)에 빠진채로 합법해 버린 <전쟁행위>는 분명 옛뱀의 후손들(렙틸리안)의 가증함은 마지막 때 그 여자의 씨로 부터 머리를 상함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말씀>과 동행하고 <그 말씀>에 속해 있고, <그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려면 자신의 모든 짐승과 같은 모든 것들 곧 <욕망>을 훨훨 털어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오염시키려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철옹성같이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곧 예호슈아님 자신이신 그분은 역시 '그 여자의 씨' 이십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루 하루 삶에서 자신을 비워 엘로힘의 그 말씀을 자신에게 담는 다는 것이, 자신이 깨끗한 빈그릇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요?? 매일의 두려운 삶 앞에서 엘로힘의 그 말씀을 곱씹어 삼키며 묵상한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게 느껴지는가요?? 단 한절의 성경말씀으로 자신의 신앙을 위로하며 '그래...바쁘니 어쩔 수 없지...' 하며 점점 색을 잃어가는 검정색처럼 모든 색들을 받아들여서 정작 자신의 색깔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요??

이것은 나의 신앙생활에 대한 반성입니다. 몸은 고되어 마음은 비었는데, 정작 <그 빈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요?? 나의 힘으로 엘로힘의 그 나라에 갈 수 없는데, 그 여자의 후손이신 예호슈아님께서 이루신 그 승리를 힘입어 업혀가야 할 것인데...너무나도 나태해져 있다 싶기에 말입니다. '아니다...아무리 힘들어도 엘로힘의 <그 말씀>을 읽기를 게을리하지 말자!! 배우지 않는 사람은 금수와 같고, 성경말씀을 담지 않은 사람은 곧 옛뱀의 사기에 걸려 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샬롬!! <2014.3.26>

 
 
<Created/20140327> <Updated/201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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